수영구 ()

수영구청
수영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부산광역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구.
정의
부산광역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으로 해운대구, 서쪽으로는 연제구와 남구, 북쪽으로 동래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수영만에 연해 있다. 동경 129°05'~129°08', 북위 35°07'~35°11'에 위치한다. 면적은 10.21㎢이고, 인구는 17만 979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0개 행정동(5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남천2동에 있다.

자연환경

서북부 지역은 금련산과 배산 등의 구릉성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계곡이 발달해 있다. 동쪽에는 수영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해운대구와 경계를 이루며 수영만으로 유입한다. 남동부 해안에는 사빈해안으로 형성된 광안리해수욕장이 있다.

광안동에 소재한 금련산(金蓮山, 415m)은 황령산과 이어져 있으며 북으로 배산(盃山)과 대하고 있다. 남으로는 남구, 북으로는 연제구와 경계를 이룬다. 부산의 세 갈래 산맥 중 하나를 이루는 금련산맥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수영강으로 단층곡이 크게 나 있으나 장산과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지명은 산이 연꽃 모양을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부처님 앞에 공양을 올릴 때 사용하는 황금색 금련화(金蓮花)에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다.

망미동에 소재한 배산(盃山, 254m)은 금련산에서 북쪽으로 약 1.5km에 위치한다. 일명 잘매산 또는 잘미산이라고도 불리며 독립 구릉성산지로 그 형태는 종순형이다. 구성암석이나 지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본래 금련산맥에 이어지는 산지였으나 오랜 지질시대의 삭박 작용에 의해 해체되면서 지금은 독립된 산지로 남아 있다. 안산암질 암석으로 구성되어 산지의 고도와 규모에 비해 산정 부근의 경사가 급한 것이 특징이다. 산정과 산능에는 규모는 작으나 성곽 모양의 토르가 형성되어 있고 여기에서 떨어져 나온 애추가 부분적으로 생성되어 있다. 그러나 북쪽의 산록은 수영강으로 향함에 따라 완만해지며 소선상지로 이어진다. 배산 정상부에는 성지가 있었으며 망미동 쪽 산기슭에 동래성이 지금의 장소로 옮겨져 고읍성이 입지하였다. 배산은 풍수형국으로 동래부의 진산인 윤산(輪山, 지금의 구월산)의 안산에 해당된다.

민락동에는 백산(白山, 129.5m)이 있다. 화산암으로 구성된 노년기의 종순형 산지이다. ‘백산’은 수영만과 수영강에서 안개가 짙게 낄 때 산 전체가 하얗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흰구름이 이 산을 덮을 때 하얀 산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유래된 지명이다. 또한 지금의 수영교 부근이 옛날에는 모두 갈대밭이었는데, 이곳에 학들이 날아와 먹이를 찾고 놀다가 이 산에 둥지를 튼 데서 백학산(白鶴山)이라 했고, 이를 줄여서 백산이라 부르게 되어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남천동에는 중골산이 있었는데, 지금의 삼익아파트 단지에 있었던 낮은 구릉성산지이다. 황령산에서 남쪽으로 남천만에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끝부분으로 산이 민둥한데다 생김새가 워낙 맥이 없어 죽은 용의 형상과 같다 하여 죽은 골산 또는 중골산으로 부르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민락동에는 진조말산(74.1m)이 있다. 전형적인 독립 구릉으로 산 전체가 종순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남동단에는 진조말이 있다. 지금 이 산은 전체가 민락공원으로 되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고개와 계곡들이 형성되어 있다. 망미동에는 조선시대 교통로로 이용되던 톳고개가 있다. 배산 동쪽에 있었던 고개로 지금의 망미동 주공아파트 앞길이 이에 해당된다. 토현(土峴) 또는 ‘톳고개’라고도 불린다. 이 톳고개는 조선시대 때 이 지역의 행정중심인 동래부와 좌수영을 총괄하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오가는 길이 이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요시 여겨졌으며, 또한 민간인들이 오가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망미동에는 새앙골이 있다. 옛날에 이곳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데서 사당골이라 하였으나, 음이 변하여 새양골 혹은 시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외에 남천동에 가장골과 삼밭골, 망미동에 옥성골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주택지로 변하였다.

동쪽에는 낙동강에 이어 부산에서 두 번째로 긴 하천인 수영강이 수영만으로 유입한다. 울산단층에 지배된 단층 곡선곡의 하천으로 양산군의 원효산에서 발원하여 남서방향으로 흐르다가 해운대구 재송동에 이르러 금정산에서 발원하는 온천천과 합류하여 수영만으로 유입한다. 강의 상류에는 부산시민의 식수를 공급하는 회동수원지가 있고 하류에는 수영만에 자리 잡은 요트경기장의 수질을 보전하기 위한 종합하수처리장이 설치되어 있다.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를 가진 이 하천은 조선시대 하구부근에 경상좌도 수군도사영(慶尙左道 水軍度使營)이 설치되면서 수영천 또는 수영강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이전에 사천(絲川)이라도 하였으나 지금은 상류 부분을 일컬을 때 사용되는 지명이다. 유로도 길고 폭도 넓어 하류에 넓은 유역평지가 형성되었고, 하류에는 규모는 작으나 삼각주도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이곳이 사천의 홍수로 매몰되어 수영 본영을 한때 감만포로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남천동에는 남천이 흐르고 있다. 황령산 남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황령산터널 아래를 지나 남천만으로 흘러드는 소하천이다. 길이 약 3280㎞로 과거에는 생천 또는 남내천(南乃川), 흠대거렁이라고도 불렀다. 흠대거렁이란 상류계곡의 맑은 시냇물이 암반의 흠을 타고 빠르게 흘러 내렸다는데서 비롯된다. 대연동과 경계를 이루는 이 하천은 최근 유로가 복개되어 있다.

수영구의 해안에 발달한 광안리해수욕장은 폭이 약 200m에 이르는 대규모 사빈해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운대해수욕장과 함께 부산의 주요한 해안관광지이다. 수영강 하구에도 과거에 사빈해안이 발달했으나 오늘날은 매립되어 요트경기장·주택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민락동에는 수영만으로 뻗은 진조말산의 기반암 곶인 진조말이 있었으며 첨이대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첫 어로작업이 시작되던 날 좌수영 수사가 의자처럼 생긴 진조암 바위에 앉아 어로 작업을 하는 어부들과 수군들을 격려하고, 어부들이 어로작업에서 올린 첫 수확물을 수사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는 자리이다. 이곳의 바다는 수영강과 바닷물이 합치는 곳이어서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유명하고 좌수영 어방놀이가 이루어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에 수군과 이곳 어부들이 협력하여 고기잡이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안동에는 칠산포가 있었다. 지금의 광안리해수욕장 일대의 포구로서 임진왜란 직후, 무관 종4품의 만호를 수장으로 하는 수군이 주둔했던 칠산포영의 자리이다.

온대해양성기후에 속하면서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과 여름의 기온차는 적다. 특히 겨울은 매우 온화하다. 풍속은 계절풍의 영향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강하며 태풍 경로상에 위치하여 풍수해를 입기도 한다. 연 평균기온 14.5℃로 1월에 가장 낮고 8월은 고온 다습하다. 난류의 영향으로 겨울의 기온이 비교적 높아 연교차는 적다. 연평균습도는 약 67%로 겨울에는 매우 저습하다.

역사

선사 유물이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동일한 생활권에 속해 있는 해운대의 청사포와 좌동 신시가지개발지역에서 구석기 유물이 채집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영구의 경우도 이 시대에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일제강점기 수영구의 좌수영(현 수영동)에서 마제석검(磨製石劍)이 출토된 예가 보고된 바 있다. 철기시대의 유물은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이 시기에 수영구는 동래 복천동고분군의 세력이나 연산동고분군의 세력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한시대에 이곳에 있던 거칠산국에 속했으며, 삼국시대에 신라의 거칠산군 대증현에 속했고, 757년(경덕왕 16)에 동래군 동평현에 속하였다.

고려 전기의 여러 사료에 비추어 볼 때 고려 초기에는 수영구가 속한 동래현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영구도 울주수령의 감독을 받으면서 이 지역에 존재하는 향리가 실질적인 통치를 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려 후기 들어 수영구는 동평현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기인 1397년(태조 6)에 동래진, 1547년(명종 2)에 동래부에 속했다. 동래부가 일본과 대치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 됨에 따라 수영강의 입구에 위치한 이곳도 전략상 중요시되었다. 조선시대 이곳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경상좌수영은 동래 감만이포에 존재하였는데, 태종대에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것이 임란 직전 동래 수영으로 옮겼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임란 직후인 1635년(인조 13) 사천(絲川)의 홍수로 말미암아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 감만이포로 옮겼지만, 이곳이 왜관과 거리가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 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1652년(효종 3)에 다시 오늘날의 수영으로 이전되었다. 좌수영은 균역법의 시행 후 수군 군량미 부족으로 10진에서 7진으로 줄어들었으나 1895년 7월에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조선시대 군사시설의 중요기지였다. 현재까지도 옛 조선시대의 좌수영지인 남문의 일부가 남아 있고, 현 민락동 현대아파트 내에는 이곳이 좌수영의 선소(船所)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늘날의 수영구 지역은 조선 후기 이후 남면(남촌면·남하면·남상면)의 일부였는데, 그 중 축산동(丑山洞, 수영성의 동쪽), 서부리(西部里, 수영성의 뒤쪽), 북문외리(北門外里, 수영동의 북쪽), 남문외리(南門外里, 수영성의 남쪽) 등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동래군 남면에 소속되었는데, 1936년에는 남면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어, 신설된 부산진출장소(대연동·용호동·우암동·감만동) 소속으로 되었다. 1942년에는 동래군의 수영과 해운대의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면서, 수영출장소(수영동·광안동·민락동)가 설치되었다.

1953년에 대연출장소와 해운대출장소에 속했다가 1957년에 구제 실시에 따라 부산진구 대연출장소와 동래구 수영출장소에 속했다. 도시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이곳은 해안에 입지하면서 남천동, 광안동을 중심으로 주택지구로 변모되고 인구가 증가하였다. 주택지역으로 남천동에는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고, 특히 1970년대 말 이후 매립지에 대형아파트를 건립하기 시작한 남천동의 해안지역 일대는 대단위 고급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부산의 대표적인 아파트촌을 형성하고 있다. 수영로터리를 중심으로 하는 수영로 일대는 해운대 및 광안리해수욕장의 입구로 각종 위락시설과 상업기능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1975년 대연출장소가 수영출장소를 편입해 남구로 승격되면서 남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95년에 남천동·수영동·망미동·광안동·민락동이 남구로부터 분리되어 수영구가 되었다. 남천(南川)·수영(水營)·망미(望美)·광안(廣安)·민락(民樂) 등 5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문화재는 좌수영 성이 있던 수영공원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수영공원에는 수영성 남문(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과 25의용단(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이 있다.

수영성 남문은 조선시대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성 남문의 홍예식 석문 일부가 수영공원 입구에 이전 보존되어 있다. 문의 양쪽에 돌로 새겨진 박견(拍犬)이 석주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남문은 원래 광안동 286-1번지의 좌수영성 남문으로 있었으나 한때 수영초등학교 쪽으로 옮겨져 교문으로 이용하다가 현재의 수영공원 동쪽 입구로 다시 옮겨졌다.

수영25의용단은 임진왜란 중 왜군과 싸워 순국한 이들의 공적을 기려 1609년(광해군 원년)에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이 지방민의 청원에 따라 25인의 사적을 살핀 데 있었다. 1853년(철종 4)에는 경상좌수사 장인식(張寅植)이 지금의 수영공원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의용단이라 이름하고 재실을 지었다.

수영공원에는 조선시대 좌수영일 때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들의 송덕비(頌德碑) 30여 기가 현존하고 있다. 17세기 말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국토임을 확인한 부산 출신 안용복을 기리기 위해 안용복장군충혼탑(安龍福將軍忠魂塔)이 수영공원 안에 있다.

수영구의 문화재로는 수영야류(국가무형문화재, 1971년 지정), 좌수영어방놀이(국가무형문화재, 1978년 지정) 및 수영농청놀이(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1972년 지정)가 있다.

수영야류는 약 200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200여 년 전에 좌수영 수사(水使)가 합천군 초계(草溪) 밤마리[栗旨]의 대광대(竹廣大)패를 데려다가 놀이를 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수영사람이 큰 장터인 밤마리에서 보고 온 후 시작되었다고도 하다.

좌수영어방놀이는 해변 어방에서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는 과정을 놀이로 구성한 것으로, 일종의 어로노동요이다. 줄틀로 줄을 꼬면서 부르는 내왕소리와 그물을 바다에 치고 나서 그물을 끌면서 부르는 사리소리 그리고 잡은 고기를 어대(漁袋)에서 풀어 담을 때의 가래소리와 풍어놀이의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화재는 수영동에 전승되고 있는 어로요를 놀이로 입체화한 것이다. 수영농청놀이는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농요로 내용은 농요가 주종목이다.

조선시대 수영성이 있었기 때문에 관방유적이 많다. 수영동 수영공원에 소재한 경상좌수영성지(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는 장축이 동서(東西)인 장타원형에 가까운 부정형(不整形)인데 성의 서쪽은 해발 27.4m의 독립된 낮은 구릉이고 그 외의 3면은 저지대인 평지로 오늘날 수영동의 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규모는 남북 직경 279.6m, 동서 534m, 성벽의 총길이 1480m, 내부면적은 10만 9728㎡로 추정된다. 성문은 4곳이 있었는데 동문은 직선으로 설치된 동쪽 성벽의 중앙부에 위치했고, 서문은 서쪽 구릉의 동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설치되어 있었다. 성의 동문을 영일문(迎日門), 서문을 호소문(虎嘯門), 남문을 주작문(朱雀門), 북문을 공진문(拱辰門)이라 하고, 이 성문에는 각기 문루(門樓)가 있었다. 이 성안에는 상영(上營), 중영(中營)이 있다. 경상좌수영은 무관인 정3품의 수군절도사가 주재하고 있는데 관장하던 진보는 경상좌도 해안의 부산진·다대진·개운진·서생진(西生鎭)·두모진(豆毛鎭)·서평진(西平鎭)·포이진(包伊鎭)·감포진(甘浦鎭)·칠포진(漆浦鎭)·축산포진(丑山浦鎭)이었다. 이 가운데 감포진·칠포진·출산포진이 1751년(영조 27)에 혁파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의 시설물은 남문의 옹성지(甕城址)와 치성지(雉城址) 2개소의 흔적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고, 성벽의 동남쪽과 서남쪽에만 부분적으로 보이는데 모두 성벽 상부가 크게 파괴되어 지금은 높이 60~260㎝ 정도만 남아 있다. 시설물로는 남문이었던 홍예문이 수영성 서쪽에 위치하는 수영공원 입구로 옮겨져 복원되어 있다.

망미동에는 고읍성터가 있다. 이 성지는 동래읍성이 현재의 위치에 있기 전에 읍치가 있었던 장소였다. 고려말 조선초 동남해안 일원의 읍성들이 위치를 이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이 현재 동래 읍치로 이건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래현의 고적(古蹟)조에 “해운포에 있다. 동남은 석축이고 서북은 토축으로 둘레가 4430척인데 지금은 허물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읍성의 구체적인 위치는 지금의 망미동에 있었던 국군통합병원 전체와 길 건너 맞은편 산비탈까지를 폭으로 하여 아래로 내려가서 도시고속도로가 지나는 그보다 더 아래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해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 동남 해안 각지에 있던 만호영들이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경주에 있던 감포만호영, 영해에 있던 축산포만호영, 흥해에 있던 칠포만호영, 울산에 있던 개운포만호영 등이 동래 남촌면으로 이전되었다. 이들 만호영은 1751년(영조 27)에 혁파되었다.

망미동에는 정과정터가 있다. 정서(鄭敍)는 동래정씨 시조 정문도공의 증손자이다. 고려 의종 때 벼슬을 하고 귀향하여 이곳에 정자를 짓고 임금을 그리워하며 외(瓜)를 심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지었고 스스로 과정이라 이름하였다. 이때 지은 노래가 악부 정과정(樂府 鄭瓜亭)곡이다.

광안동에는 망경대터가 있었다. 망경대는 이 지역에 경상좌수영이 설진되어 있었을 때 좌수영의 우측 척후처(斥候處)가 있었던 자리이며, 좌수영 좌측에서 적의 동태를 탐망하는 척우처인 첨이대는 망경대 동쪽으로 마주보는 위치인 백산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망경대는 1960년 무렵부터 시가지로 바뀌어 가다가 1960년대 후반의 시가지 계획으로 시가지와 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수영동 수영공원 안에는 198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곰솔나무가 있다. 곰솔은 해송 또는 흑송이라고도 한다. 가슴높이 직경 약 1.4m, 수관의 폭 23.5m, 높이 27m에 이른다. 껍질(콜크)무늬는 길이 약 21cm, 폭 약 9.8cm의 크기로 거북 등처럼 갈라져서 소나무 줄기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수령은 약 4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군선(軍船)을 보호하는 군신목(軍神木)이어서 군사들이 제사를 지내는 나무로 전해지고 있다. 수영공원의 푸조나무는 198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느릅나무과에 속하며 따뜻한 남부지방에 자생하는 낙엽교목이다. 이 나무의 원줄기는 중앙부에 요철이 심하며 둘레는 약 10m 정도이다. 수령은 500년쯤으로 보고 있다. 푸조나무에서 40m정도 떨어진 자리에 임진왜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수영고당(水營姑堂: 송씨할머니당)이 있어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한해의 무사안녕을 비는 마을제사를 지낸 후 수영야류를 연희했다고 한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0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5개교, 특수학교로 부산배화학교가 있다.

남천동에는 KBS부산방송총국이 있다. 1935년 조선방송협회 산하 부산연주소로 개소하였으며 1950년 4월 10일 부산방송국으로 승격하였다. 1972년 초량 새사옥으로 이전하였으며 1984년 부산방송본부로 승격하였다. 1988년 남천동 새사옥이 준공되어 이전하였고, 1993년 부산방송총국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민락동에는 부산문화방송이 위치하고 있다. 민간상업방송의 효시사인 부산문화방송은 1959년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이후 1970년 한국문화방송 부산TV국을 개국하였고, 1997년 사옥을 수영구 민락동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새사옥 준공과 함께 대형 공개홀을 개봉영화관인 시네마홀로 개관, 지역민들에게 새로운 문화의 장을 제공함과 동시에 부산음악콩쿠르, 청소년상, 영상작품 공모, 고교축구대회, 홈페이지 경연대회 등의 행사를 통해 지역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민속

수영구의 자연마을에는 여러 당산이 있다. 민락동에는 당산이 두 곳 있어서 한쪽을 할배당산, 한쪽을 할매당산이라 하는데 할배당산은 민락동의 끝자리 진조말산의 산비탈에 있으며 사당이 지어져 있다. 할매당산은 할배당산에서 북쪽 500m 지점인 수영강 어귀가 되는 계곡 입구에 있다. 이 할매당산에도 사당이 지어져 있다. 민락당산나무는 할매당산 뒤에 있는 소나무를 말한다. 수령은 330년쯤으로 보고 있다. 이외에 민락동 백산의 보리전당산, 수영 고당의 송씨할매당, 남천동의 천신각 등이 있다.

설화·민요

예전의 수영천이 수영만으로 유입하고 있어 하구를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한 곳이었으며 공동 어로노동을 위하여 노동요가 발달하였다. 좌수영어방놀이는 해변 어방에서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는 과정을 놀이로 구성한 것으로, 일종의 어로노동요라 할 수 있다. 줄틀로 줄을 꼬면서 부르는 내왕소리와 그물을 바다에 치고 나서 그물을 끌면서 부르는 사리소리, 그리고 잡은 고기를 어대(漁袋)에서 풀어 담을 때의 가래소리와 풍어놀이의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과장인 내왕소리는 후릿그물 양쪽 다불줄에 연결하기 위한 줄을 만들면서 부르는 소리이며, 제2과장인 사리소리는 바다에 쳐 놓은 그물을 후리질 하면서 부르는 소리이다. 제3과장인 가래소리는 잡은 고기를 어대에서 퍼내며 부르는 소가래로 운반되며, 12명의 동네 여인들이 나와서 광주리로 여다 나른다. 제4과장인 칭칭소리는 모든 작업을 마치고 풍어를 자축할 뿐 아니라, 다음의 풍어를 축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영청놀이의 농청놀이의 내용은 농요가 주종목이다. 각 노래를 보면 모심기노래는 1행이 3~4음절 4구로 된 2행시가 한 토막을 이루고, 선·후창으로 분창한다. 김매기노래는 논김을 맬 때 부르는 남자들의 노래이다. 북을 세 번 울리면, 일제히 “에이 에이”를 두번 하고 앞소리가 “에-헤-아-아”라 하면 뒷소리도 그와 같이 외친다. 선창이 한 구절을 부르면, 후창은 “에-헤-아-아”를 후렴으로 제창한다. 가사의 내용은 수영팔경을 중심으로 이 고장의 풍경을 노래한다. 김매기는 남정네로서도 매우 힘든 노동이어서 흥겹고 구성진 소리를 함으로써 고됨을 달래주는 것인데, 보리 타작소리는 모내기철에 부르는 농요로 1음보 격으로 단조롭고 빠르며 가사도 짧다.

산업·교통

원래 농어촌지역으로 광안만을 중심으로 어업이 활발하였다. 광안리 해수욕장 앞에는 남양어장이 있었다.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넙치를 비롯하여 고등어·망상어 등의 연안어족이 풍부하여 소형어선을 이용한 고기잡이가 성했던 곳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제일의 해상 현수교인 광안대교이 가설되어 어장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들 어업은 1960년대 후반에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급격히 쇠퇴하였으나 활어를 판매하는 유통 기능은 매우 활발하다. 남천동에는 오래 전부터 바다서 갓 잡아온 해산물을 팔고 사는 파시(波市)같은 활어시장이 있었다. 처음에는 노천에서 바닷물을 담은 넓은 그릇에 살아 있는 어패류를 담아 팔다가 이후 가건물을 지어 판매했다. 바다가 매축되고는 바다에서 멀어진 자리가 되기는 하였으나 건물을 짓게 되어 50여 개 점포가 들어서 고기와 패류들을 팔고 있다.

공업은 망미2동을 중심으로 수영동·광안동 등에 섬유·화학·기계 등의 소규모 업체들이 있으나, 그 비중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점차 감소 추세에 있다. 상업은 수영로터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이곳은 조선시대 좌수영장이 있던 곳이다. 매 5·10일 개시하였으며 인근의 동래 읍내장·부산장 등과 연계를 하며 장이 섰다. 좌수영이라는 군사시설과 수영강을 끼고 있는 편리한 교통시설은 시장이 발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좌수영장은 지금도 수영팔도시장, 수영건설시장 등으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교통은 남북 방향으로 관통하는 수영로가 남구 교통의 요충지인 수영로터리를 중심으로 연산로·과정로와 연결되고 있으며, 광안로·호안도로 등이 있어 타 지역과 편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영천에는 수영교·민락교와 수영2호교로 해운대구와 연결된다.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으며 수영만을 가로지르는 광안대교가 완공되어 이곳의 교통은 매우 원활하다. 광안대교는 부산광역시의 항로 및 산업 물동량의 원활한 우회 수송을 통해 수영로·중앙로 등 도심 간선도로의 교통난을 완화하고, 해상 관광 시설의 역할을 제고할 목적으로 2003년 개통된 것이다. 국내 최초의 2층 해상교량으로, 현수교 역시 국내 최대 규모이다. 또 국내 최대 규모의 3경간 연속 2층 트러스교를 현수교 양측에 360m씩 건설함으로써 광안해수욕장의 야경과 함께 부산광역시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수영구 남천동과 해운대구 우동의 센텀시티를 연결되면서 이곳 교통체계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육상교통을 해상으로 우회시켜 해운대구와 수영구간에 육상교통의 원활을 꾀할 뿐 아니라 해운대·광안리해수욕장과 민락수변공원·이기대공원 등 천혜의 자연경관을 연계한 우리나라 최장 최대의 해상 현수교량으로 부산의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

관광

해안을 끼고 있어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광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광안리해수욕장 주변지역은 관광호텔·횟집·카페 등 숙박업소를 비롯한 각종 위락시설 및 유흥음식점이 발달해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관광레저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민락동은 광안리해수욕장을 끼고 약 200여 개의 횟집이 몰려 있어 부산의 회센터로 각광받고 있으며, 매년 활어축제를 열고 있다. 한편 광안리해수욕장 일대는 화랑·소극장·공연장 등이 들어서면서 문화의 거리로 조성되고 있다. 이곳에서 예술단체 또는 시민단체가 바다축제·바다미술제·바다음악제·바다무용제·모래조각전 등을 개최하고 있다. 광안리해수욕장을 마주보면서 수영만을 가로지르는 해상도로인 광안대교가 완공되어 새로운 관광지로서 각광받고 있다.

민락동 매립지에 있는 활어시장과 회센터는 부산의 대표적인 먹거리촌의 하나이다. 광안리해수욕장 동쪽 민락동 바닷가가 70년대에 매립되자 갓 잡아온 고기와 패류를 해수가 담긴 함지에 담아 노지에서 팔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후 해수공급과 장시간의 판매를 위해 사옥을 짓고 어패류 판매가 집단화되면서 1983년에는 옥내의 광안활어시장이 형성되고 연이어 이웃에 민락활어시장이 생겨났다. 1990년도 초에는 10층의 현대식 건물인 민락타운이 세워져 활어판매장과 횟집이 들어서게 되고, 1998년에는 8층의 씨렌드 회센터가 세워져 아래층에서는 어패류시장이 형성되어 2층 이상은 회요리 전문의 회센터가 형성되면서 민락동 매립지는 활어와 회요리로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남천동의 먹자골목은 수영구청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길다랗게 난 도로에 깊은 맛을 내면서도 격조 있는 음식점들이 밀집하여 있다. 한식집, 해물요리집, 일식집, 육고기전문집들이 제각각 특색을 드러내며 즐비해 있다. 대부분의 음식점이 분위기가 편안하여 집 같은 구수함을 보여 정담이 오가는 연회석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축제는 광안리해변축제와 남천동벚꽃축제이다. 광안리해변축제는 매년 7월 해수욕장이 개장되면서 축제가 열린다. 부산시립국악단, 시립교향악단, 시립무용단, 시립합창단 같은 예술단체와 대학 및 전통민속예술단 또는 민간예술단을 초청하여 무대공연을 실시한다. 축제 기간 동안은 해변문학강좌, 전통민속강좌 등이 개설되고 사생대회, 모래조각전 등도 열린다. 해수욕장 중심지가 되는 남천동과 광안동에는 화랑, 소극장, 공연장 등이 많아 해변축제와 어울려 여름의 문화예술이 꽃피워진다. 해마다 부산관광축제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부산바다축제 때는 이곳 광안리해수욕장을 중심으로 해운대·송정·일광·송도·다대포 해수욕장 등과 연계된 다채로운 행사가 5일 내지 1주일 동안 열리고 있다. 남천동에서는 매년 4월 초 벚꽃축제가 열린다. 남천동의 아파트단지에는 삼익비치타운이 지어진 1982년에 차도와 일반통행로 양쪽에 620주(株)의 벚나무를 심었다. 이 벚나무가 4월초 꽃을 피울 때면 아파트단지가 장관을 이룬다. 1991년부터 매년 4월 아파트 연합회 주관으로 벚꽃축제를 열고 있다.

대표적인 예술전시관으로 수영공원에 위치한 수영민속예술전수관이 있다. 역사적 고적의 보호관리와 향토민속예술의 연구 및 계승발전을 위해 수영야류, 좌수영어방놀이, 수영농청놀이의 보존 및 전승에 행정적 뒷받침을 하면서 그에 대한 출판물도 발간하고 있다.

광안리해수욕장은 남천동의 삼익비치맨션 동북쪽에서 민락동의 바다매립지까지의 사장일대를 말한다. 1970년대의 남천동 앞바다 매립과 1980년대 후반의 민락동 앞바다 매립 이전의 광안리해수욕장은 남천동 앞바다에서 민락동의 백산서쪽 기슭까지가 되었지만 지금은 양쪽지역의 매립으로 해수욕장이 줄어들었다. 금련산으로부터 유입된 양질의 사질로 이루어진 사장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해수욕장이다. 광안동 금련산에는 청소년수련소가 있다. 이 외에 민락동에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시민의 산책로이자 휴식처가 되면서 낚시터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동(洞)
  1. 남천동

구의 남쪽에 소재한 동으로 남천만에 연해 있다. 지명은 남구 대연동과 남천동의 경계지점인 황령산계곡에서 발원하여 수영만으로 유입되는 길이 3280m의 남천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동래부지』(1740)의 포구조에는 남천포(南川浦)가 기록되어 있는데, 부(府) 남쪽 20리에 위치하며 어장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어장의 일대를 남천만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남천만과 대연동 사이의 모든 해안을 통칭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400년 전이었다고 전해지며 금련산 기슭의 가장골에는 동제당이 있었다. 1942년 수영출장소 남천동에서 출발하여 남천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민락동

구의 동부 수영강 우안 하구에 위치한 동이다. 『동래부지』(1740)등의 자료에는 지명이 보이지 않지만, 남촌면 감포리(甘浦里)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민락동에는 백산 북쪽의 ‘보리전’마을과 백산 남쪽의 ‘널구지’마을 등 2곳의 자연마을이 300년 전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널구지마을을 평민동(平民洞)이라 했고, 보리마을을 덕민동(德民洞)이라 했다. 이 두마을을 합치면서 민락동 지명이 생겨났다. 민락은 여민동락(與民同樂)·여민해락(與民偕樂)의 준말로 임금은 즐거움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이곳 좌수영의 수사가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1. 수영동

구의 북동부 수영천에 연한 동으로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곳이다. 수영이란 이름은 수군절도사영의 약칭으로 관아명이 동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오늘날의 수영동은 조선시대 동래부 남촌면(南村面)의 1동 15리 중에서 동부리(東部里)·서부리(西部里)·북문외리(北門外里)·남문외리(南門外里)의 4리가 이에 해당된다. 1895년 옛 군제(軍制)가 폐지되고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이곳을 수영이라 하였다. 1942년 10월 시구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부 수영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5년 남구에 속하였으며, 1995년에는 수영구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른다.

  1. 광안동

구의 동남부에 위치한 동으로 해수욕장과 연해 있다. 조선시대 수영 지명은 행정 지명이 아니었고, 지금의 수영동·망미동·광안동·민락동 등을 총칭하는 지역이었다. 일제 때 시구 정리에 따라 수영동이 수영성을 중심으로 구획되자 나머지 지역은 새로이 좋은 이름으로 지어, 해안과 모래벌을 가진 곳이라 넓은 해안이란 뜻의 광안(廣岸)이라 하였다가 풍수지리상 광안(廣安)이라 명명되었다. 널리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한다. 광안리는 조선 후기 남문외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1946년 광안동에서 광안1·2·3·4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망미동

구의 서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래부지』(1740)에 기록된 남촌(南村)의 북문외리(北門外里)와 서부리(西部里)에 해당된다. 이 일대는 넓은 의미의 수영지역에 포함되나 수영동의 설치에 따라 배산 주변은 망미동으로 명명되었다. 지명은 배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배산의 연산동 기슭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어 그 신주(神主)는 배미산(盃美山) 산신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현재의 주민들도 이 산을 배미산 또는 잘미산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현재의 수영동과 망미동 사이의 산을 망산(望山)이라 한다. 망미동은 망산의 망(望)자와 배미산의 미(美)자가 합쳐서 된 명칭으로 풀이된다. 한편 망미동은 수영성 북문 밖에 위치하며 수영의 수사가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를 들었다는데서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혹은 고려 의종 때에 귀양 온 정서(鄭敍)가 북쪽을 바라보며[望] 임금[美]을 절을 했다는 뜻에서 명칭이 생겨났다는 여러 설이 있다. 1914년 동래군 남면 수영리에서 1942년 수영출장소 수영동으로 되었다가, 1979년 수영동에서 망미동으로 독립되었으며 이후 망미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통계연보』(부산광역시수영구, 2008)
『부산통계연보』(부산광역시, 2005)
『구정백서』(부산광역시수영구, 2005)
『부산교육통계연보』(부산광역시교육청, 2005)
『부산의 당제』(부산광역시, 2005)
『한국지리지 -경상도편』(건설부국립지리원, 2005)
『수영구의 민속과 문화』(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2005)
『부산의 민속문화』(세종출판사, 2003)
『부산민요집성』(세종출판사, 2002)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2)
『부산지명총람』(부산광역시, 1995~2002)
부산광역시 수영구(www.suyeong.go.kr)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김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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