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해운대구, 서쪽으로는 부산진구, 남쪽으로는 수영구와 남구, 북쪽으로는 동래구와 접한다. 동경 129°02'~129°05', 북위 35°09'~35°11'에 위치한다. 면적은 12.08㎢이고, 인구는 21만 718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2개 행정동(2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2동에 있다.
남부에는 황령산과 금련산을 잇는 산지가 둘러싸고 있고, 북서부에도 금정봉과 금용산 등의 산지지역이 나타난다. 중앙에는 거제동과 연산동을 경계 짓는 거제천이 흐르며 구의 중앙을 지나 전체적으로 남북으로 열린 지형을 나타낸다. 금정산에서 발원한 온천천이 남류하다가 연제구와 만나 동류하면서 동래구와의 경계를 이루며 재송동에서 다시 남류하여 해운대와 대하면서 수영만에 유입한다.
남쪽에 황령산과 금련산이 남구와 수영구와의 경계를 이룬다. 연산동에 소재한 배산(盃山)은 해발 254m인 독립 구릉성 산지로 그 형태는 종순형이다. 잘매산 또는 잘미산이라고도 불린다. 안산암질 암석으로 구성되어 고도와 규모에 비해 산정 부근의 경사가 급한 것이 특징이다. 동쪽의 산록은 수영강으로 향하면서 완만해져 소규모 선상지를 형성한다. 산정과 산능에는 규모는 작으나 토르가 형성되어 있고 곳에 따라 애추가 생성되어 있다. 풍수지리로 보았을 때 동래부 진산인 윤산(輪山, 지금의 구월산)의 안산이다.
거제동에 소재한 화지산(和池山, 142m)은 부산진구 양정동, 초읍동과 경계를 이루는 전형적인 구릉산지로 산정은 종순형을 나타내고 사면은 완만하다. 지금의 연지동 자리인 화지산 아래에 ‘화지언’(和池堰)이라는 못이 있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동래부지』(1740)에 “동래부 서쪽 10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장(戶長)을 지낸 동래정씨의 시조인 정문도(鄭文道)의 묘가 있는 산”이라 기록되어 있다.
거제동에 소재한 금용산(金湧山, 149.6m)은 부산진구 · 동래구와의 경계를 이룬다. 한글지명인 쇠미산을 한자화한 지명이다. 쇠미산은 이 산에 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부산의 등줄산맥인 금정산맥의 지맥으로 북쪽으로 금정봉과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화지산과 연결된다.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사면이 완만하고 산정은 종순형이다.
거제동에는 도심의 동산인 개구리산이 있다. 부산광역시교육청의 뒷산으로 화지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구릉성 산지이다. 해발 50m 안팎 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습이 마치 개구리와 같다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십자산도 도심에 있는 구릉성산지이다. 부산교육대학교와 지하철 교대역 앞 사이에 있는 이사벨여중 · 고의 뒷편의 산으로 해발 46m이다. 지명은 산꼭대기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십자가가 꼭대기에 세워지기 전 이 산지는 한자로 학란(鶴卵), 혹은 ‘황새알’ 또는 ‘한새알’이라 불렀다. 이는 옛날 학의 고장이던 동래지방에 이 동산의 모습이 황새알과 닮은 데서 비롯되었다. 지금 이 일대에 황새알 옛동산을 비롯하여 황새알벌, 황새알 마을들, 학과 황새에 관련된 이름이 주위에 많이 남아 있다.
황령산과 금련산 산지에는 여러 계곡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중 대표적인 계곡은 마하사골과 물만골이다. 연산3동에 소재한 마하사골은 금련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가는 소하천의 계곡으로 상류에 마하사가 자리 잡고 있어 지명이 유래되었다. 연산3동 마을을 지칭할 때 이 지명이 사용된다. 연산2동에 소재한 물만골은 황령산 봉수대 아래에서 발원하여 북쪽 사면으로 흘러내리는 소하천의 상류계곡에 해당된다. 물만골이란 이 계곡이 깊은데다가 물이 맑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외에 거제동에 도둑골, 연산동에 밤골, 배나무골 등이 있다.
구의 북동부에 온천천이 동류하면서 동래구와 경계를 이룬다. 온천천의 중류에 해당하면서 퇴적작용은 활발하지 않으나 소규모의 하천부지를 형성하고 있다. 과거 버려진 땅이었으나 지금을 생태공원으로 정비되어 시민들의 산책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동래와의 경계를 이루기 때문이 이 하천에는 조선시대 동래부와 연결되는 교통로상에 교량이 많이 건설되었다.
연산동에 소재한 이섭교는 동래구 수안동과 연결되었던 다리이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1694년(숙종 20)에 동래구 수안동에서 연제구 연산동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수영강에 놓인 다리로서 3개의 아치를 연결한 돌다리였다. 그리고 이섭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인 이섭교비가 있다. 연산동에 소재한 세병교는 동래구 수안동과 연제구 거제동을 잇는 다리로 온천천에 세워져 있다. 세병(洗兵)이란 병기를 씻어서 거둔다는 뜻으로 전쟁이 끝나 평화가 돌아옴을 말한다. 다리 지명은 동래성 남문의 익성(翼城) 가운데의 앞쪽문을 세병문(洗兵門)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세병교가 건설되기 전에는 광제교(廣濟橋)라는 돌다리가 있었는데 동래 사람은 부산진으로 가는 다리가 되어서 부산다리라고도 했다.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나 바다와 가까이 있어 온대해양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교차가 비교적 적으며 특히 겨울철에는 금정산맥이 북서계절풍을 막아주어 다른 지방보다 비교적 온화하다. 봄에는 이동성저기압의 영향으로 비가 자주 온다. 바람은 다른 지방보다 강하며, 태풍의 경로상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풍수해를 입기도 한다. 연평균기온은 14.4°C, 최고기온은 32.8°C, 최저기온은 영하 7.9°C로 비교적 온화한 편이고 연중 강수량은 1,383.9mm이다. 강수량이 가장 많은 달은 7월로 314.4mm가 기록되었고, 8~9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비가 오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구내의 거제동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취락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연산동고분군에서 철제갑옷과 투구들이 출토되어 당시 이 지역의 지배세력은 무장적인 정치적인 권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장악 ·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인 신라 탈해왕(57∼79) 때 신라에 병합되어, 505년(지증왕 16)에 거칠산군이 되었고,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동래군에 속하였다.
『고려사』 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지역에는 고려 전기에 이르러 주현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고려 전기 동래현은 울주수령의 감독을 받으면서 이 지역의 향리가 실질적인 통치를 하였고 연제 지역도 동래 향리의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현령을 두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한편 고려 전기 이 지역에서 동래정씨 문중이 발흥하여 지방 호족이 되었다.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동래정씨는 문종대에 정목(鄭穆)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과 손자인 정항(鄭沆)과 정서(鄭敍) 등이 계속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로 인해 동래정씨 가문은 문벌귀족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 동래는 1397년(태조 6)에 동래에 진을 설치하게 되자, 병마사가 동래현의 행정관인 판현사를 겸임하였으며, 1423년(세종 5)에는 병마사를 4품관인 첨절제사로 개칭하여 판현사를 겸임하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연제 지역은 동래현 현령의 지배 하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1601년(선조 34)에 이르러 일본으로부터 적극적인 강화교섭이 오자, 당상의 문관으로 부사를 삼았다. 이에 연제 지역은 당상관인 동래부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체제 속에 오늘날의 연제구는 서면의 거벌리와 남촌면의 일부에 해당된다.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부산부가 설치되어 동래 행정구역의 일부가 부산부의 지배를 받았으나, 1914년 군 · 면 통폐합에 따라 이전 동래부의 일부와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을 설치하여 경상남도에 속하였다. 이때 지금의 연제구에 해당하는 지역도 경상남도의 동래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1936년에는 서면이 부산부로 편입되면서 지금의 연제구 지역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고, 1957년 1월부터 구제의 실시로 부산시 동래구에 행정적으로 편제되었다. 도시산업화로 부산 도시 공간이 확장되고 특히 서면 쪽으로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이에 인접한 연제구는 급속한 지역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1997년 부산시청 · 부산시의회 · 부산지방경찰청의 신청사가 건립되어 이전하고 뒤이어 부산 지방법원, 고등법원, 지방 검찰청, 고등검찰청 등이 이전하면서 부산의 행정 · 사법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연제구의 인구증가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1995년 3월에 동래구의 연산동과 거제동을 중심으로 하여 분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거제(巨堤) · 연산(蓮山) 등 2개 동이 있다.
연산동 황령산 기슭에는 마하사(摩訶寺)가 있다. 창건연대는 신라시대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마하사의 연기에 따르면 394년(내물왕 39)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경북 선산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桃李寺)를 세우고, 남으로 내려와 나한기도도량(羅漢祈禱道場)인 마하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사찰 지명은 불경 중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유래된 것이다. 말사로 반야암(般若庵)과 바라밀다사(波羅密多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어 없고 마하사 입구와 그 앞의 언덕에 축대만 조금 남아 있다. 국가유산청에 전통사찰로 등록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연산동에는 배산의 북쪽으로 뻗어 나온 능선 정상부를 따라 대형성토분구를 가진 고분 10여 기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주변의 구릉 경사면에는 중 · 소형분들이 배치되어 있다. 아래쪽 도로가 개설되면서 잘려나간 부분에도 몇 기의 대형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심 고분은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기의 무덤임에 비해 주변 사면에 영조된 무덤은 5세기 후반에서 7세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석실묘들이다.
이 고분군에서는 일제강점기 철제갑주류들이 출토되어 국내외로 관심의 초점이 되어온 유적이다. 출토된 유물을 분석한 결과 고분군은 5세기 후반대에서 6세기 전엽에 거쳐 영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연대적으로는 복천동고분군에서 바로 후속되는 것으로 이 고분 집단은 복천동고분군과 동일집단이며 한정된 묘역에서 고분군의 영조가 끝나자 이 지역으로 옮겨져 영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대의 이 지역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유적으로 당시 신라와 가야의 역학관계, 패권의 추이 등을 구명할 수 있는 유적이다.
온천천에 있는 이섭교비(利涉橋碑)는 1980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이섭교를 놓고 그 다리가 완공됨에 세운 비석이다. 이섭교 자체는 없어졌으나 이섭교 곁에 세워졌던 이섭교비는 현재 동래구 온천동 산131-4 금강공원 안에 이건되어 있다. 비석에는 개축에 참여한 사람의 직책과 성명 그리고 개축에 협력한 각 면의 계(契)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향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높이 237㎝, 폭 110㎝, 두께 28㎝의 크기로서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와 더불어 부산지방의 기념비 가운데 가장 큰것에 속한다.
연산동에는 겸효대(謙孝臺)가 위치한 터가 있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배산성지가 있는 부근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사료료 볼 때 당시 배산에 김겸효라는 선인이 기거했던 겸효대가 있었으며 도심 속의 산림공간으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연산동에는 배산성지(盃山城址)가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성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정식 학술발굴조사를 한 적도 없어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거도열전(居道列傳)에 의하면, 신라 4대 탈해왕 때 거도라는 장수가 거칠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병합하였다는 그 거칠산국시대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지가 있는 부근에는 연산동고분군이 있어 그 고분군과의 연관성에도 주목할 만하다. 이 배산성은 배산의 허리부분과 정상에 쌍가락지 모양으로 성을 쌓은 이중성(二重城)인 토성이다. 현재는 토성의 기초부분만 남아 있고 산 정상 바로 아래는 폭 2m 정도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는 그때의 식수원으로 추정된다.
거제동에는 남문구라는 지명이 있다. 동래부사청이 있는 동래읍성의 남문인 세병문은 오늘날의 동래경찰서 북쪽에 있었다. 지금의 부산교육대학 앞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되고 역이 생기자 역 지명을 남문구라 한데서 교육대학 주위를 오늘날에도 남문구라 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7개교와 부산교육대학교와 부산경상대학이 있다. 거제동에 소재한 부산교육대학교는 1946년 부산사범학교로 개교하였고 1955년 부산사범대학이 개교하였다. 1961년 부산사범학교와 부산사범대학을 통폐합하여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신제 부산사범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81년 4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연산동에 소재한 부산경상대학은 1980년 부산경상전문대학으로 개교하였으며, 1998년 부산경상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연산동에는 연제문화원이 지역문화의 중심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1997년 개원한 이 문화원은 지역문화 조사, 연구사업, 지역축제 개발 · 육성사업, 지역주민 문화의식 함양사업, 지역환경보존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활동을 하고 있다. 연제구에는 연산도서관이 있다.
거제동에는 언론기관으로 국제신문이 있다. 1947년 산업신문으로 창간하여 1950년 국제신보로 개제하였다. 1958년 지방지 최초로 조 · 석간 발행을 하였다. 1977년 국제신문으로 개제되고 1979년 9월 1일 중앙동에 신사옥 준공을 하여 이전하였다. 1980년 11월 25일 군사독재권력에 의해 폐간되어 1989년 2월 1일 복간되었다. 1994년 8월 14일 거제동 신사옥인 국제문화센터를 완공하여 이전하였다. 종합일간지 발행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예술행사, 교육 · 공공 · 사회사업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관련 행사와 사업을 직접 시행하기도 한다. 문화센터를 운영하며 도서와 외부 간행물을 발행하고 있다.
연제구에는 매장과 관련한 독특한 민속 풍습이 있었다. 연산동에는 채봉터가 있었다. 채봉이란 일종의 초분(草墳)으로 죽은 시체(屍體) 위에 풀을 쌓아두는 풀무덤이었다. 이 초분은 남 · 서(南西)해안이나 섬에서 행해졌는데 이곳 초분은 명당자리를 찾을 때까지 초분을 해 두는 경우가 있었다. 연산동에는 애씨등터라는 구전지명이 있다. 이는 어린아이가 죽어 묻을 때는 봉분이 없는 평장을 했으며 그렇게 아이를 묻는 곳이 지역에 따라 관례처럼 되어 있는 외진 곳이 있었다. 그곳을 애기장터 또는 애장터라 했다. 연산동의 애기장터는 그 당시에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아 외진 곳이었던 연산6동과 7동으로 오늘날의 복개천 위쪽 소나무가 있는 언덕 자리로 전해지고 있다.
각 마을에는 당산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연산동의 대리당산, 배산의 산제당, 연산동 곡리의 할배당산, 연제동의 거평당산 등이 있다. 이중 배산산제당은 배산의 용화보궁 옆에 위치한다. 제의 날짜는 음력 섣달 그믐 자정 경이며, 1년에 1회이다. 제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당산신은 여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옛날 제의의 차례는 주산당신제→신마을 골매기당산제→거릿대제 순으로 구성되었다.
연제구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마하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여러 연기설화가 전해진다. 마하사가 있는 산을 금련산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명칭 유래를 살펴보면, 산이 연꽃 모양을 해서 금련산이라 했다는 말도 있고, 부처님 앞에 공양을 올릴 때의 황금색 찬란한 금련화(金蓮花)의 이름을 따서 금련산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지명은 마하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하사 창건과 관련된 설화로는 마하사의 16나한이 있다. 나한이란 부처님의 제자를 말하는데 옛날 옛적의 어느 해 동짓달 밤에 절안에 있던 불씨란 불씨가 모두 꺼져 버렸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화로에 불을 모아 두었다가 그 불씨가 다 꺼져 버렸으니 어찌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냉방에서 밤을 지낸 주지가 부엌으로 나아가 보니 화덕에 불이 피고 있지 않은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황령산 봉화불을 지키던 봉화꾼이 절로 내려와서 어젯밤에 동자승이 그 험한 길에 불을 얻으러 왔기에 불을 주면서 죽을 끓여 먹여 보냈는데 잘 왔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절에서는 동자승 누구도 간 적이 없었다. 이 무슨 조화냐고 16나한을 보니 그 가운데의 한 나한의 입술 주위에 죽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마하사에는 많은 설화가 전하여 오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나한에 대한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농업은 황령산 기슭의 터밭에서 주말농사 형태로 이루어질 뿐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공업은 소규모 업체를 중심으로 섬유 · 화학 · 기계 등의 업종이 발달했으나, 신설공장이 거의 전무하며 기존 업체들도 타지역으로 이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산로터리 이면도로에 부분적으로 분포한다. 1997년 연제구에 부산시청 · 부산시의회 · 부산지방경찰청의 신청사가 중구 중앙동으로부터 이전하여 건립되고 뒤이어 부산 지방법원, 고등법원, 지방검찰청, 고등검찰청 등이 이전하여 법조타운을 형성하면서 연제구는 부산의 행정 · 사법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산국세청, 부산시 교원연수원등이 연산동에 입지하면서 연제구는 과거의 주변 지역에서 행정 · 사법 · 공공서비스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연제구의 인구증가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상업 · 업무지역은 연산로터리와 과정로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다.
시가지는 남서부에서 북동부로 연결된 중앙로와 지하철 1호선이 온천천 부근의 평지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최근 지하철 3호선이 개통되어 1호선과의 환승역이 연산동역이 되면서 연산로터리는 연제구의 교통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부산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그 외 연산로 · 거제로 · 과정로 등의 간선도로가 발달해 주변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철도는 동해남부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거제리에는 철도관사터가 있었다. 1935년 부산울산경주 사이를 연결하는 동해남부선이 개통되었다. 당시 거제동을 지나는 동해남부선 부설을 위해서는 1930년대 초부터 철로부설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에 일본인 기술자가 소요되었고 그 기술자의 주택이 필요하게 되었다. 철도국은 거제동에 철도부지를 광범위하게 설정하여 지금의 거제동 철도역 서쪽이자 화지산 동쪽인 현재의 거제4동 지역에 철도관사를 세운 것은 1930년대 초의 일이었다. 목조에 기와를 올린 136가구를 세웠는데 철도관사터라 불리었고,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편입되어 주변은 일반주택지로 바뀌었다.
거제동에는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가 있다. 1984년 11월 1일 총무처정부기록보존소부산지소로 개소하였으며 정부 중요기록물의 보존관리와 열람업무 제공을 담당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및 정부 수립 이후의 정부 중요기록물 40여만 권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지적원도와 각급 관공서의 설계도, 공무원의 인사 및 연금, 병적카드 등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낮은 늪지대로 수련이 많고 배산 및 황령산 쪽은 산지로 되어 연산(蓮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이 동네의 중심 산은 황령산의 지맥인 금련산(金蓮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원래 거벌리(居伐里)에 속하였다. 오늘날의 연산동은 당시 농작물이 되지 않는 저습지대로 수련(水蓮)이 만발하였고, 홍수기가 되면 동래천이 범람하였다. 일제강점기 동래천에 제방을 쌓으면서 거벌리란 이름을 없애고 이 땅을 분할하여 서쪽은 거제동, 동쪽은 연산동이라는 새로운 동 지명을 부여하였다. 자연마을로 토현 · 안락(安樂) · 후리(後里) · 곡리(谷里) · 대리(大里), 신리(新里) · 전리(田里) 등이 있었으나, 거의 사라졌고 일부는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1910년 연산동이라는 동명이 형성되고 난 이후부터 인구가 계속 증가하여 지금은 연산1·2·3·4·5·6·7·8·9동으로 분동되었다. 단일 법정동으로는 부산지역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동이다.
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조선시대 서면에 속하였으며 동리명을 거벌리(居伐里)라 하였다. 거벌(居伐)은 거벌(巨伐)로 표기되어 ‘큰 벌’을 뜻하는 원야(原野)를 의미한다. 이 원야는 오늘날 거제동과 연산동 일대에 펼쳐있는 넓은 들을 말하는데, 이 지역이 바로 거벌리였다. 원래 거벌리에는 큰 들은 있었지만 조선시대 이후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제방을 쌓았고 이후 ‘큰 제방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한편 거제리에 있었던 옛 전차정류소 지점과 그 인근을 홰받지라 불렀다. 홰받지, 즉 홰바지는 해받이라고도 불리는데 지명 유래로 동래부에서 부산으로 마중 가는 지점이라는 설과 횃불을 들고 마중 가는 지점이라는 설이 있다. 자연마을로 거점(炬店) · 거제(巨堤) · 대조(大鳥) 등 3곳이 있었다. 거제동은 1957년 구제 실시로 동래구에 편입되고, 1970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거제1·2·3동으로 분동되었으며, 1979년에 거제4동이 또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