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장군은 문헌에 의하면 장본(獐本)이라고도 하였다. 장군은 자기(磁器)뿐 아니라 도기(陶器)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는데 재질에 따라 용도도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자기로 제작된 것은 술병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권27(세종 7년 2월 을묘일)의 기록에는 조선에 온 중국 명나라의 사신 윤봉(尹鳳)이 성지(聖旨)를 전하며, 조선왕실에 10탁분(卓分)의 사기를 요구함에 따라 경기도 광주목사에게 장본(獐本) 10개를 정세(精細)하게 구워바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조선시대 장군은 완과 접시처럼 실제 사용빈도가 높은 실용기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장군은 먼저 물레에서 몸체를 원통형으로 성형한 후에 뚜껑을 만들어 부착하거나, 한쪽을 오므려 마치 둥근 럭비공처럼 성형한다. 이후 옆으로 뉘여서 한 면에는 구멍을 뚫어 주구(注口)를 붙이고 다른 면에는 원형이나 타원형의 굽을 따로 제작하여 붙여서 만든다. 장군 가운데는 측면에 굽이 있는 경우도 있어서 옆으로 세우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장군의 몸체를 보면 먼저 양측 면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승렴문(繩簾文)을 빼곡하게 시문하였다. 몸체 한가운데 위치하여 화면을 양분하는 문양대에는 선상감(線象嵌)으로 커다란 당초문을 율동감있게 장식하였고, 제기의 형태와 유사한 굽에는 부드러운 C자형 곡선을 상감하였다. 양분된 동체부에는 윤곽선이 뚜렷한 커다란 모란당초문을 면상감(面象嵌)하여 마치 거울을 바라보듯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도자기의 모란문은 조선 전기 분청사기뿐 아니라 상감백자에도 자주 시문되며, 부귀영화라는 모란 본래의 상징의미 전달과 함께 그릇의 장식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시문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장군의 문양은 전체적으로 문양대의 구획이 분명하고 좌우가 대칭되게 문양을 시문하여 기형과의 조화를 꾀하였다.
이 장군은 안정감 있고 당당한 기형과 활달하고 대담한 문양, 섬세한 인화기법의 표현 등에서 15세기 분청사기장군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도자사 흐름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