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본관이 진주이고,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 퇴재(退齋) · 퇴휴당(退休堂)이다. 1504년(연산군 10) 19살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1509년(중종 4)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와 형조 · 호조 · 병조 · 이조 등의 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찬성과 좌찬성에 올랐다. 문장이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며 글씨는 송설체에 능하였다. 1562년(명종 17) 7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익산의 화암서원(華岩書院)에 배향되었고, 문집으로는 『양곡집(陽谷集)』이 전한다.
소세양신도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嘉靖四十三年(가정43년)”이라 되어 있어 1564년(명종 19)임을 알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용화산(龍華山) 동쪽 산기슭에 위치하며,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진주소씨익산회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장방형의 기단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옥개형(屋蓋形) 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기단석은 가로 196㎝, 세로 112㎝, 높이 90㎝의 크기로서 사면에는 국화문을 조각하였고 윗부분은 연판문(蓮瓣紋)으로 장식하였다. 비신은 높이 218㎝, 폭 103㎝, 두께 25㎝의 대리석으로서 전면 상단에 자경(字經) 약 12㎝의 전액(篆額)이 “左贊成蘇公神道碑銘(좌찬성소공신도비명)”이라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경기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였던 심전(沈銓)이 쓴 것이다. 비문은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이 찬(撰)하였고, 비명(碑銘)은 소세양의 아들 소수(蘇遂)가 해서체로 썼다. 이수(螭首)는 가로 128㎝, 세로 77㎝, 두께 43㎝의 화강암 석재로서 한 마리의 용이 똬리를 튼 형태로 힘차고 굵게 조각되어 있다.
기단 · 비신 · 옥개[이수] 등 비석으로서 기본적인 구성을 잘 갖추고 있으며, 그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다만, 비신에 얹혀 있는 개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기단석 전면에 놓여 있는 이수가 파손되어 도괴의 위험이 따르므로 교체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되어 현존하는 비석 중 조성시기가 빠르며, 조선시대의 비석으로서 기본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이 매우 뛰어나고 서체가 아름다워 신도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