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은 부산 출생으로 본관은 연주(延州). 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다.
현인은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2까지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다. 그는 1943년 징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태양극단’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에 귀국했다.
1947년에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의 권유로 대중가요 가수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신라의 달밤」은 그 시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를, 전쟁 중에는 군예대로 활동하면서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를 발표하였다. 같은 시기에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와 「인도의 향불」, 「꿈 속의 사랑」, 1950년대 후반에는 「나포리 맘보」, 「불국사의 밤」 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모았다. 특히 「서울야곡」 등은 직접 작사·작곡한 곡이다. 그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서, 일제강점기의 트로트와 신민요를 소화하였고, 미국식 대중가요가 개화한 1960년대의 팝 스타일의 가창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KBS특별가요대상, 1996년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 본상(골든디스크 부문), 1999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3년 현인의 고향 부산 영도에 「굳세어라 금순아」 가사가 새겨진 현인노래비가 동상과 함께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