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 ( - )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조선시대사
문헌
문화재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이 보사공신 회맹 때의 회맹문과 복훈 때의 축문 등을 모아 엮은 관찬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20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 - 保社功臣錄勳後)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2007년 04월 20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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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이 보사공신 회맹 때의 회맹문과 복훈 때의 축문 등을 모아 엮은 관찬서.
개설

숙종대에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재집권하면서 보사공신(保社功臣) 중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파훈(罷勳)되었던 5명의 공신을 복훈(復勳)하였다. 이들이 복훈된 사실을 종묘에 고하면서 보사공신 회맹시의 회맹문과 회맹록, 축문(祝文) 등 일련의 기록을 작성하여 1축으로 완성하였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2021년 2월 국보로 승격되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공을 세운 신하에게 보사공신호가 내려졌는데, 서인 세력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일부에 대해 공신호가 취소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다시 훈명을 추록하였다. 이 문서는 보사공신 녹훈 시의 회맹문과 복훈 시의 축문 등을 동일한 축에 기록하여 하나의 권축장으로 꾸민 것이다.

서지적 사항

세로 88.5㎝, 가로 2,414㎝의 장대한 크기에 주사란(朱絲欄)이 선명하며 끝에 권축을 달아 고급스럽고 화려한 형태를 띠고 있다.

내용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1680년(숙종 6) 8월에 있었던 보사공신회맹(保社功臣會盟) 시의 회맹문(會盟文)이다. 공신과 그 자손으로서 국은(國恩)을 충심으로 갚아 나가고 공신 자손들끼리도 서로 단결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이어지는 회맹록(會盟錄)에는 회맹에 참여한 공신과 자손의 군호·공신호·직함·성명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불참자의 명단을 신병(身病), 재상(在喪), 발병(廢病), 연유(年幼), 변장재외(邊將在外), 피적(被謫) 등 사유별로 구분하여 실었다. 작성 일자를 강희(康熙) 19년[1680년(숙종 6)] 8월로 기록하였다.

두 번째는 1694년(숙종 20) 6월에 복훈 사실을 종묘에 고하면서 쓴 축문을 기록하고 작성 일자를 적었다. 그리고 세필(細筆)로 ‘기사년에 파훈되고 갑술년에 복훈되었다’는 내용을 주기한 후,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공신 녹훈과 삭훈 과정, 숙종대 정국과 변화 양상 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의 공신들』(신명호, 가람기획, 2003)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문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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