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대에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재집권하면서 보사공신(保社功臣) 중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파훈(罷勳)되었던 5명의 공신을 복훈(復勳)하였다. 이들이 복훈된 사실을 종묘에 고하면서 보사공신 회맹시의 회맹문과 회맹록, 축문(祝文) 등 일련의 기록을 작성하여 1축으로 완성하였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2021년 2월 국보로 승격되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공을 세운 신하에게 보사공신호가 내려졌는데, 서인 세력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일부에 대해 공신호가 취소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다시 훈명을 추록하였다. 이 문서는 보사공신 녹훈 시의 회맹문과 복훈 시의 축문 등을 동일한 축에 기록하여 하나의 권축장으로 꾸민 것이다.
세로 88.5㎝, 가로 2,414㎝의 장대한 크기에 주사란(朱絲欄)이 선명하며 끝에 권축을 달아 고급스럽고 화려한 형태를 띠고 있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1680년(숙종 6) 8월에 있었던 보사공신회맹(保社功臣會盟) 시의 회맹문(會盟文)이다. 공신과 그 자손으로서 국은(國恩)을 충심으로 갚아 나가고 공신 자손들끼리도 서로 단결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이어지는 회맹록(會盟錄)에는 회맹에 참여한 공신과 자손의 군호·공신호·직함·성명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불참자의 명단을 신병(身病), 재상(在喪), 발병(廢病), 연유(年幼), 변장재외(邊將在外), 피적(被謫) 등 사유별로 구분하여 실었다. 작성 일자를 강희(康熙) 19년[1680년(숙종 6)] 8월로 기록하였다.
두 번째는 1694년(숙종 20) 6월에 복훈 사실을 종묘에 고하면서 쓴 축문을 기록하고 작성 일자를 적었다. 그리고 세필(細筆)로 ‘기사년에 파훈되고 갑술년에 복훈되었다’는 내용을 주기한 후,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
조선시대 공신 녹훈과 삭훈 과정, 숙종대 정국과 변화 양상 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