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필사본, 첩장, 1첩. 38.0×25.2㎝
「성수침 필적(成守琛 筆蹟)」은 성수침이 당나라 가도(賈島)의 「숙촌가정자(宿村家亭子)」, 두목(杜牧)의 「등낙유원(登樂遊原)」, 이상은(李商隱)의 「상아(常娥)」와 송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전가(田家)」등 칠언시를 행서로 쓴 서첩이다.
표지에는 성수침의 호 ‘청송’을 붙여 ‘청송서(聽松書)’라고 쓰여 있다. 원래는 두루마리 형식의 권자본(卷子本)으로 되어 있던 것을 줄[行]에 따라 잘라 첩으로 개장(改粧)한 것이다. 이 서첩은 송명흠(宋明欽, 1705∼1768) 후손의 기증품으로, 송명흠의 아버지 송요좌(宋堯佐, 1678∼1723)의 ‘청은당(淸隱堂)’이란 인영(印影)이 안쪽 첫 면에 찍혀있다.
성수침은 이황(李滉, 1501∼1570)과 함께고법인 왕희지(王羲之) 서풍으로의 복귀를 주도했던 16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이자 명필이다. 현재 그의 필적은 드문 편으로, 소자(小字)가 몇몇 전하고 있고 대자(大字)는 목판 글씨밖에 전하지 않는다. 이처럼 큰 글자로 쓴 작품이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문 예이며, 운필하는 속도에 따라 먹의 농담이 드러날 정도로 담묵(淡墨)을 즐겼던 그의 특징이 또한 잘 나타나 있다. 성수침은 유행서풍에 경도되지 않고 창고(蒼古)한 기풍을 추구했는데, 이 필적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