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서화가이자 평론가인 표암(豹菴)강세황(姜世晃)이 역대 명인의 시구(詩句) 가운데 일부 구절을 뽑아 쓴 행초(行草) 서첩.
구성 및 형식
내용
말미의 강세황의 자발(自跋)에 “이 종이의 이름은 죽청지(竹淸紙)로, 우리나라 남쪽 고을에서 생산된다. 비문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이 종이를 구하는데, 촘촘하고 얇아서 모각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림을 그리려 해보니 잘 맞지 않아 마침내 전인(前人)의 가구(佳句)를 써서 이에 응한다. 경술년(1790) 겨울 표옹은 쓴다.[此紙名竹淸紙 出於我東之南邑 寫碑文者 必求是紙 以其緊薄而便摹刻也 今欲作畵則不相宜 遂書前人佳句以應之 庚戌冬豹翁書]”라고 적혀있다. 이처럼 서첩의 내용 가운데 특정 종이를 재료로 썼음을 언급한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죽청지는 예로부터 비문을 쓰기에 적합한 종이로 문헌에 자주 언급되어 왔다. 이 외에도 죽청지는 영ㆍ정조 연간의 여러 궁중 행사를 기록한 각종 의궤 및 기명(器皿)과 칙사의 예물에 쓰이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음이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강세황은 자신의 글씨를 ‘이왕미조(二王米趙)’라 하여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의 서법을 기초로 미불(米芾)과 조맹부(趙孟頫)의 서풍을 가미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중년 이후 미불을 중심으로 자득한 행초서를 노년에까지 구사하였다. 특히 이 필적은 강세황이 78세 되던 1790년 겨울에 쓴 필적이다. 그는 그 해 겨울을 채 못 넘기고 이듬해 정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 『표암유채』는 죽음을 불과 며칠 앞두고 쓴 글씨인 셈이다. 그런데 이 필적에서는 중년 이후 형성된 강세황 특유의 행초서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그의 필력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시기까지도 장년기의 서풍이 일관된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 필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하겠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이재난고(頤齋亂藁)』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 『한국의 옛글씨』(문화재청, 201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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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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