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공삼(公三), 호는 성재(惺齋). 김태석은 대한민국 국새 1호의 인고(印稿)를 작성하였고, 중화민국의 임시 초대 총통을 지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옥새를 새긴 것으로 유명한 서예가이자 전각가이다.
김태석은 1874년 6월 21일 서울 중구 장교동에서 부친 김재하(金在夏, 1849∼1922)와 모친 우봉 김씨(牛峰金氏, 金載信의 딸)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재하는 음양과에 합격하여 관상감 소속관인 삼력관(三曆官)을 지냈으며, 조부와 증조부 등도 산학과 천문학을 전공하는 등 김태석의 집안은 대대로 전문 기술관을 세습한 중인 가문이었다.
김태석은 30세에 궁내부 통신사 전화과 주사를 시작으로 궁내부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한때 평창군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35세에 궁내부 미술 시찰 위원으로 일본을 잠시 다녀온 뒤 바로 청으로 건너가 20년 가까이 줄곧 중국의 인주국(印鑄局) 관원으로 활동하다 귀국하였다.
그 후 10여 년간 국내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해방 직전 일본에서 귀국하여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를 창립하여 서단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10일에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 금락동에서 별세하였다.
김태석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말년 제자이자 역관 출신의 문인 서예가인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 1831∼1915)과의 사승 관계를 통해 20대에 시 · 서(詩書)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그는 헌종 때 신위(申緯)와 조두순(趙斗淳)이 편집하여 만든 인보(印譜)인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에 찍힌 인장들이 대한제국기에 화재로 소실되자 그 모각본을 제작하는 사업에 참여하였다.
1908년(융희 2)에는 궁내부 미술 위원으로서 일본 궁내성 시찰관으로 파견되었을 당시 『승사인보(乘槎印譜)』를 제작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청에 파견되었을 때에는 『청유인보(淸遊印譜)』를 제작하여 영인하였다.
신해혁명(1911) 후에는 중화민국 국무원 인주국에 근무하며 임시 초대 총통으로 있던 위안스카이의 인장을 다수 새겼고, 1928년에 중국에서 귀국하여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약 10년간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 『남유인보(南遊印譜)』를 제작하는 한편 전주와 김제 출신의 이광열(李光烈)과 최규상(崔圭祥) 등에게 전서와 전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3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귀국하기까지 재일 체류 시기에 『동유인보(東遊印譜)』를 제작하였고, 귀국한 뒤 1946년에는 전국 단위의 서예 조직체인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를 결성하여 활발한 서단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는 1909년에 청 연경에서 습자(習字) 교육을 목적으로 제작한 『김성재사체서법(金惺齋四體書法)』과 『승사인보(乘槎印譜)』를 포함하여 다수의 인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