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박태유의 글씨가 해서(楷書)·행초(行草)·초서(草書)·예서(隸書)·행서(行書) 등 다양한 서체로 씌어 있으며 44면의 절첩(折帖)으로 표장되어 있다. 내용은 9수의 당시(唐詩)와 2개의 단구(短句)로 이루어져 있다.
대자 해서는 우무릉(于武陵)의 오언절구 「환주(歡酒)」, 중자 해서는 가지(賈至)의 「조조대명궁정양성료우(早朝大明宮呈兩省寮友)」, 소자 해서는 왕유(王維)의 칠언율시 3수 「칙차기왕구성궁피서(勅借岐王九成宮避暑)」, 「춘일여배적신창리방여일인불우(春日與裴迪過新昌里訪呂逸人不遇)」, 「적우망천장작(積雨輞川莊作)」과 최호(崔顥)의 칠언율시 「행경화음(行經華陰)」을 쓴 것이고, 중자 행초는 이백(李白)의 칠언절구 「아미산월가(蛾眉山月歌)」, 「망천문산(望天門山)」, 소자 행서는 왕유의 칠언율시 「작주여배적(酌酒與裴迪)」을 쓴 것이다. 대자 초서는 회소(懷素)의 「자서첩(自叙帖)」구절, 대자 예서는 “서유육의(書有六義)” 4자를 썼다.
『박태유 필적 백석유묵첩(朴泰維 筆蹟 白石遺墨帖)』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명필인 박태유(朴泰維)가 글씨 학습을 위한 법서(法書) 제작을 목적으로 쓴 서첩으로 여겨진다.
박태유와 동생 박태보(朴泰輔) 형제는 조선 17세기에 당(唐) 안진경(顔眞卿) 서풍을 선구적으로 수용한 명필로 알려져 있다. 박태보가 『정재집(定齋集)』에 기록한 형 박태유의 가장(家狀)에 따르면 박태유의 글씨가 “뼈대와 살집이 서로 조화로우며 매끄러운 숫돌에 광채가 나는듯하여 글씨가 크면 클수록 더욱 건장하고 작을수록 더욱 생기발랄하였다.”고 하여 그가 기존에 큰 영향을 미쳤던 한호(韓濩) 서풍에서 벗어나 안진경 서풍을 선구적으로 수용하였음을 설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의 자체(字體)가 크게 일변하고 연경(燕京) 서점에 있는 안진경의 서첩 값이 올라갔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백석유묵첩』은 해서·행초·초서·예서·행서가 모두 실려 있어서 박태유 서예의 면모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서첩이다. 원래 첩장(帖裝)된 것이었는데 근래에 가리개 양면으로 개장되었던 것을 최근에 다시 첩장으로 개장하였다. 표지에 “白石遺墨帖(백석유묵첩)”이라 쓴 제첨은 현대 서예가 농산(農山) 정충락(鄭充洛)이 쓴 것이다.
이 서첩에 쓰여 있는 해서는 소해(小楷)·중해(中楷)·대자서(大字書)로 다양하며 특히 중자 해서로 당(唐) 가지(賈至)의 칠언율시 「조조대명궁정양성료우(早朝大明宮呈兩省寮友)」를 쓴 글씨는 당 안진경(顔眞卿) 서풍의 수용이 잘 나타나 있다. 당 왕유(王維)의 칠언율시를 쓴 소자 해서는 전세대의 명필인 한호 서풍을 바탕으로 안진경의 해서풍이 약간 가미되어 있다. 또 행초를 섞어 쓴 이백(李白)의 칠언절구 「아미산월가(蛾眉山月歌)」와 「망천산문(望天門山)」은 아버지 박세당의 서풍을 따랐으며, 한 면에 두 글자씩 큰 초서로 쓴 “사지격절 이식현오(辭旨激切 理識玄奧)”는 광초(狂草)의 대가 당 회소(懷素)가 쓴 「자서첩(自叙帖)」의 구절로 국내의 서예가가 회소의 글씨를 임서(臨書)한 것으로 남아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이밖에 예서로 쓴 “서유육의(書有六義)”는 한자의 기본서체인 육서(六書)를 가리키는데, 아직 한예(漢隸)의 정형이 구사되지 않고 해서의 필획이 남아있어 김수증(金壽增)을 비롯한 17세기 중반 예서의 일반적 경향을 보인다. 필사한 연유나 시기 및 글씨를 받은 사람의 이름 등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글씨 학습을 위하여 써준 서첩으로서 법서(法書)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로 여겨진다.
박태유의 다양한 서체가 실려 있고 글씨의 크기도 다양해 그의 글씨의 면모를 한 눈에 살펴보기에 적합한 자료이다. 아울러 회소(懷素)「자서첩(自叙帖)」의 일부를 임서한 글씨도 있어 서예사적으로 의미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