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필사본, 첩장, 1첩. 39.9×37.0㎝
이 서첩에는 「취정원수좌하(醉呈元帥座下)」, 「영보정(永保亭)」, 「덕산현(德山縣)」, 「신창산정(新昌山亭)」, 「단양도담(丹陽島潭)」, 「차한산벽상운(次韓山壁上韻)」, 「제쌍계당(題雙溪堂)」, 「차고산관운(次高山館韻)」, 「아산제영(牙山題詠)」등 9수가 실려 있고 말미에 김현성의 제사(題辭)가 붙어있다. 매 면마다 5줄의 글씨를 세로로 오려붙여 장첩(粧帖)하였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서첩의 작성 경위에 관해서는 말미의 제사(題辭)에 그 사연이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이증의 아들 이경함(李慶涵, 1553∼1627)이 부친의 옛 동료였던 김현성에게 이증의 유고를 부본(副本)으로 남기기 위해 글씨를 써줄 것을 청하자 김현성이 이에 응해 필사한 것이다. 이증은 한산 이씨로 예조판서로서 아천군(鵞川君)에 봉해지고 의간공(懿簡公)에 추증되었다.
김현성은 석봉(石峯)한호(韓濩, 1543∼1605)와 함께 동시기에 이름을 날린 송설체(松雪體)의 명가인데, 특히 성수침(成守琛, 1493∼1564) 등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유려한 서풍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서첩의 글씨는 조맹부에 핍진했던 15세기 송설체의 대가 안평대군의 글씨와 달리 16세기 조선화된 송설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필적이다. 63세때의 노숙한 필치라는 점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김현성의 필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바탕을 잘라 장황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며, 특히 말미의 제사를 통해 필사동기와 연대를 알 수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