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초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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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문신 · 서예가 양사언이 당나라 저광의의 오언시 「낙양도」를 초서로 필사하여 엮은 서축. 서예 · 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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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전기 문신 · 서예가 양사언이 당나라 저광의의 오언시 「낙양도」를 초서로 필사하여 엮은 서축. 서예 · 초서.
서지적 사항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필사본, 축장, 1축. 41.5×123.3㎝

내용

「양사언 초서(楊士彦 草書)」는 16세기 문신·시조작가·초서명필로 유명한 양사언의 대자 초서 필적으로, 당나라 저광의(儲光羲)의 오언시 「낙양도(洛陽道)」5수 가운데 제1수를 쓴 것이다. 원래 서첩으로 장황되어 있던 것을 후대에 축(軸)으로 개장하였다.

양사언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이후)와 더불어 16세기를 대표하는 초서 명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금강산과 같은 선경(仙境)을 좋아하고 세속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듯이 글씨에서도 당나라 장욱(張旭)과 회소(懷素)의 방일(放逸)한 초서를 매우 애호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양사언의 필적으로 「봉래유묵(蓬萊遺墨)」(보물, 2007년 지정.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국한문을 섞어 쓴 자작 시문 원고로 문학연구 자료로 중요하다. 또 『근묵(槿墨)』(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실린 시고(詩稿) 등 몇몇 소품이 전하는데 이들은 모두 작은 글씨로 쓴 초서이다. 이에 비해 오언시 필적은 둥근 원필세(圓筆勢)의 빠르고 거침없는 대자 초서(大字草書)로, 자유분방하고 도가적 기풍의 예술세계를 가졌던 양사언의 성품과 그가 지향했던 초서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더욱이 말미에 조선후기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1749년 발문(3건)과 조명교(曹命敎, 1687∼1753)의 발문이 함께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이에 따르면 이광사는 양사언의 글씨에서 보이는 의태(意態)와 격조가 한 무제(武帝)의 도가적 경지에 비견되지만 골력이 좀 부족하다고 평가한 반면, 조명교는 양사언의 글씨를 명대(明代)에 간행된 유명한 법첩 『희홍당첩(戲鴻堂帖)』과 『정운관첩(停雲館帖)』에 실린 필적들과 비교하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의 옛글씨』(문화재청, 예맥, 2009)
「조선시대 초서풍 연구」(유지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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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유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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