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라 말의 고승인 선각국사(先覺國師)도선(道詵, 827∼898년)의 초상화[眞影]이다. 1805년 화승(畵僧) 도일(道日)이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보물, 1990년 지정)과 함께 중수한 것이다. 도선국사는 호남의 3암사(승주 선암사, 광양 운암사, 영암 용암사)의 하나로 선암사를 창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암 출신으로 월유산 화엄사에서 출가하여 846년 동리산 태안사의 혜철을 찾아가 크게 깨우쳤으며 그후 전라남도 광양 옥룡사에 머물며 이름을 널리 떨쳤다. 72세로 태안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왕이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우측을 향해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앉아 족대(足臺) 위에 발을 올려놓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도선국사의 모습을 그렸다. 도선국사는 오른손으로 긴 주장자(拄杖子)의 중간 부분을 잡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서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엄지와 약지, 소지를 구부리고 있다. 삭발한 머리에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3줄 있고 코는 짧으면서도 둥근 편이며, 꾹 다문 작은 입의 주변으로는 팔자 주름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도선국사는 녹청색의 장삼에 화려한 문양이 장식된 홍가사를 걸쳤는데, 왼쪽 가슴 부근에는 가사를 고정시키는 금빛의 둥근 금구(金具) 장식이 보이며 가사고리 장식에서 녹청색과 짙은 감색의 매듭띠가 의자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가사의 윤곽선 옆으로는 금니선을 나란히 그어 바림질을 했으며, 전답에는 당초문과 초화문을 반복하여 그렸으며 가사의 모서리의 첩(貼)에는 금박을 붙여 입체감을 주었다. 목과 양쪽 손목에는 백삼(白衫)이 드러나 있다.
스님의 오른편에는 다리가 긴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검은색의 인함(印函)이 놓여 있다. 인함은 앞면 중앙에 잠글 수 있는 자물쇠가 있고 그 아래 둥근 고리가 달려 있으며 모서리에는 금속장식을 했으며 뚜껑 윗부분도 금속으로 장식하였다. 도선국사의 진영에 인함을 그려넣은 것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전해오는 3종의 도장을 상징한 듯하다. 족대 아래에는 화문석이 깔려있는데, 마치 벽면에 세워진 것처럼 문양들이 수평으로 배치되었다. 이처럼 원근법을 무시한 비합리적인 묘사법은 족대와 탁자에서도 볼 수 있어 전반적으로 그림이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화면의 향좌측 상단에는 적색의 제첨(題簽)에 ‘이창주도선국사진영(二刱主先覺國師道詵眞影)’이라 적혀있으며, 우측에는 제첨없이 먹으로 ‘도선국사진영(道詵國師眞影)’이라 적혀있다. 향좌측의 제첨 옆에는 5줄의 영찬(影讚)이 적혀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임진협종전당혜근배수경찬(鍾壬辰夾錢塘惠謹拜手敬贊)이라고 하여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혜근(懶翁 慧勤, 1320∼1376)이 중국에 머물던 임진년, 즉 1352년 음력 2월[夾鍾]전당(錢塘: 지금의 杭州)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화기에 의하면 이 진영은 1805년에 도일이 대각국사 진영과 함께 중수했다고 하는데, 1702년 선암사에 도선과 대각의 영각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진영은 당시 영각에 봉안되었던 도선국사의 진영을 초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일(道日)은 18세기 말∼19세기 초반에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으로 특히 선암사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선각국사 도선 진영은 높은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오른편을 향하고 있는 좌안칠분면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대각국사진영(1805년), 서악등한진영(西岳等閒眞影), 눌암식활진영(訥庵識活眞影) 등 선암사에서 성행했던 진영 형식 가운데 하나로, 각 작품에서 주장자의 형태라든가 기물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 작품은 대각국사진영과 함께 19세기 초에 도일에 의해 성립된 새로운 진영 형식의 시원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