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38년전주사범학교 2학년 재학 중 선만학생미전(鮮滿學生美展)에 입선, 다음 해에는 특선을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미술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다. 학생 신분으로 1940년 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선(船)」으로 입선하였고 1941년에는 일본 녹음사화학교(綠陰社畵學校)를 졸업했다. 1946년부터 경기공립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교편활동을 하던 중 1949년 제 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으로 약칭)에서 「폐림지 근방」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6.25 전쟁기에 그는 대구사범학교, 진해여고, 서울사범학교 교사, 서울대 강사 등 주로 교직에 몸담으며 생활하였다. 1953년 수복 후 개최된 제2회 국전에 「뒷산」이 무감사 특선을 수상하였고 연이어 제3회와 제4회 국전 출품, 특선으로 입상하여 1956년 최초의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59년에는 초대작가가 되었으며 1960년 제9회 국전부터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교편활동 또한 그의 삶에서 큰 축을 이루는데, 1955∼196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1년에 서울대학교로 거처를 옮겨 1986년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서양화과의 교수를 역임하며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1957년 1월에는 보수나 급진에 치우치지 않고 순수한 제작활동에 전념할 것을 표방했던 창작미술협회의 창립에 가담했다. 이봉상(李鳳商)의 주도로 결성되었던 이 단체에는 류경채를 비롯해 최영림(崔榮林), 장리석(張利錫), 황유엽(黃瑜燁), 이준(李俊), 고화흠(高和欽), 박항섭(朴恒燮), 박창돈(朴昌敦) 등 중견작가들이 참여하였다. 1960년에는 이 단체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각종 단체전과 해외 전시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작업에서는 1960년 이전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던 구상적인 요소들이 사라지고 서정적인 추상회화를 모색해 나갔으며 80년대 이후에는 기하학적이고 단순화된 추상화로 작업의 범위를 넓혔다.
1979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87년에는 예술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86년 서울대학교를 퇴임한 후에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시활동을 계속하였는데 1995년 타계하던 해에도 싱가포르의 아세아 국제전에 출품했을 정도로 쉬지 않고 일생을 작품 활동에 정진했다. 그는 사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1949년 제1회 국전 대통령상
1957년 서울시 문화상
1977년 국민훈장 동백상
198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5년 3·1문화상
1992년 제1회 오지호 미술상
1995년 금관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