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림회는 1960∼1964년까지 활동했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문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화 단체이다. 서세옥을 주축으로 민경갑·정탁영·전영화 등 동양화단 신진작가들의 모임이다. 명대의 유명한 수장가였던 항원변(1525∼1590)의 호 ‘묵림(墨林)’을 차용하여 ‘묵림회’로 명명했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총 8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 단체는 전통 재료를 이용한 추상, 또는 반추상의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했다. 묵림회를 계기로 사숙(私塾)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동양화단의 풍토가 대학 동문 중심의 단체와 활동으로 변화했다.
1961년 묵림회에서 아세아재단(亞細亞財團)에 제출한 원조자금 신청서에 게재된 내용으로 전해지는 이 단체의 설립목적은 기존화단에 대한 비판과 새로움의 추구였다. 1950년대 동양화단의 고루한 시각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폐단,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 사이의 대립에서 나타나는 화단의 파당성 등 기존화단의 문제점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젊은 신진 작가들로 구성된 단체가 없었던 동양화단에 ‘한국 동양화단의 유일한 전위적 청년작가들의 집결체’로서 구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의 동양화를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59년 12월, 서세옥(徐世鈺)을 주축으로 민경갑(閔庚甲)·정탁영(鄭晫永)·전영화(全榮華) 등은 묵림회 창립을 위한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명대(明代)의 유명한 수장가였던 항원변(項元汴, 1525∼1590)의 호인 ‘묵림(墨林)’을 인용하여 단체의 명칭을 ‘묵림회’로 명명했다.
1960년 3월 6일에 정식으로 발족한 묵림회는 이 달 22일부터 31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묵림회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에는 서세옥·민경갑·정탁영·전영화·박세원(朴世元)·권순일(權純一)·최애경(崔愛敬)·이영찬(李永燦)·이순영(李順瑛)·장선백(張善栢)·장운상(張雲祥)·이덕인(李德仁)·이정애(李廷愛)·남궁훈(南宮勳)·최종걸(崔鍾傑)·신성식(辛聖植) 등 16명이 참가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개최된 제2회 묵림회전에는 장운상·박세원·전영화·권순일·장선백·이영찬·이순영·이정애 등이 탈퇴하고 나머지 8명만이 참가하였다. 1961년 2월에 개최된 제3회 전시에는 차평리(車平里)·송영방(宋榮邦)·김상순(金相淳) 등이 새롭게 합류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 제4회, 6월에 제5회 전시를 개최하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5회전부터는 안동숙(安東淑)과 금동원(琴東媛)과 같은 서울대학교 졸업생이 아닌 작가도 참여하면서 회원수는 증가하였으나, 1962년 이후에는 1년에 한 번으로 전시 횟수는 감소하였다. 1964년 12월 국립중앙공보관에서 개최된 제8회 전시는 30명이 참가했으나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해산하였다.
묵림회 해체 후 대부분의 회원들이 다시 모여 1967년한국화회를 결성하였다. 2019년 제53회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동문전의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세옥을 중심으로 한 동양화단 신진작가들의 의욕적인 모임이었던 묵림회는 이 단체를 주도했던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전통재료를 이용한 추상, 또는 반추상의 실험적인 작업이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작업양식의 연원에 대해서는 동양전통의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문인화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회화의 현대화를 모색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와 당시 서양의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 등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평가가 전개되고 있다.
묵림회는 양식면에서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묵림회를 계기로 대학 동문중심의 다양한 단체들을 결성하고 활동하면서 사숙(私塾)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기존의 동양화단의 풍토를 변화시켰다는 점에도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