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은중경은 많은 종수의 판본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1454년(단종 2)에 평양의 광법사에서 간행된 판본이다. 본래 선장으로 장책되었던 것을 복장에서 나온 이후 최근에 권자본 형태로 보수하였다. 1378년에 개판된 무오본을 모본으로 1407년 또는 1432년에 명빈 김씨의 발원으로 간행한 판본 중 하나를 선정하여 복각한 것이다. 이 책은 고려 말 1378년 간본과 선초 1407년, 1432년에 간행된 판본과 동일한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들 간에 하나의 계통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은중경은 중국에서 당나라 때 찬술되어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경으로 ‘위경(僞經)’이라 한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로 필사본으로 유포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이후로 공덕을 위해 목판본이 많이 간행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다. 이 무렵 우리나라는 원나라로부터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일대 사상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이며, 조선시대의 사찰에서 유교 사회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간단 없이 간행되었던 경향을 보인다.
합본된 태골경 말미에는 ‘경태5년갑술정월 일 평양부대성산광법사개판(景泰5年甲戌正月日平壤府大成山廣法寺開板)’이라는 간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다음 행에는 시주자 ‘전만호이사영(前萬戶李思榮)’을 비롯해서 많은 민간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각수로는 ‘연해(衍海)’선사, 화주에는 ‘지상(智尙)’, 반두(飯頭)에는 ‘의오(義吾)’가 참여하고 있음이 보이고 있다.
간기에 보이는 광법사는 고려시대에 창건한 거찰로 현재 북한에서 중시하는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이 사찰에서 조선시대 간행된 판본으로는 유일한 경우이다.
목판본(판화수록) 1권. 권수의 서명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며, 다음 행에 ‘구마라집봉 조역(鳩麻羅什奉詔譯)’이란 역자표시가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은중경은 본래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으로 알려져 있어 역자 표시가 있을 수 없으나, 마치 진경으로 보이기 위해 가장 널리 알려진 번역가인 구마라집을 가탁(假託)한 것이다.
권말에는 진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진언이 끝나는 다음 행으로부터 은중경의 이본(異本)인 ‘불설부모은중태골경(佛說父母恩重胎骨經)’이 합본되어 있다. 그리고 간기와 시주질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주자가 모두 민간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邊欄)은 상하단변으로 상하간 판고(板高)는 20.2㎝이다. 행자수(行字數)는 접은 한 면을 기준으로 7행 15자씩 배자되어 있다. 판식이 본래 권자 또는 접장의 형태로 만들어져 판심(板心)은 별도로 만들지 않았으나, 경문 사이에 ‘부모(父母)’라는 간략 서명과 그 밑으로 장수(張數)표시가 보이고 있다. 판심제(板心題)가 다른 계통의 판본에 일반적으로 ‘은(恩)’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은중경은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예로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 천 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한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의 제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은혜에 대한 보답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모의 은혜를 갚는 실천적 방법은 7월 15일의 우란분재(盂蘭盆齋)에 삼보(三寶)를 공양하고, 이 불경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서 한 구절 한 게송을 잘 익혀 마음에 새기면 오역(五逆)의 중한 죄라도 소멸된다고 하였다.
이 책은 효행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민중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본문에 도상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독특한 편집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 초기에 평양의 광법사에서 간행된 판본은 현재 국내 유일본으로 추정되어 불교판본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