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방공동체(明禮坊共同體)는 1784~1785년 한성부 남부 명례방에 위치한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갖던 한국천주교회 초기의 신앙 공동체이다. 1784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에 이벽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에게 대세(代洗)를 주었다. 이후 한동안 이벽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다가 여러 사람이 모이기에 장소가 협소하여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김범우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임 6개월 만에 형조(刑曹)의 금리(禁吏)에게 적발되어 공동체가 와해되었다.
1784년 초겨울, 한성부 남부 수표교(水標橋) 이벽(李檗, 17541785)의 셋집에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이 이벽, 권일신(權日身, 17411792),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을 모아놓고 집단적인 세례의식(洗禮儀式)을 거행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계속해서 이승훈은 김범우(金範禹, 17511786?, 토마스), 최인길(崔仁吉, 17651795), 지황(池璜, 17671795),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이존창(李存昌, 1759~1801)을 포함하여 불과 몇 달 만에 수십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신자들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자 모임 장소를 수표교에서 멀지 않은 장악원(掌樂院) 앞 김범우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이 행정 구역상 명례방에 속했으므로 이 신앙 공동체를 오늘날 연구자들이 ‘명례방공동체(明禮坊共同體)’라고 부른다.
역관(譯官) 출신인 김범우는 이벽과 함께 초기부터 교리서를 공부하며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김범우의 집은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 181에 있는 외환은행 본점 자리이다.
명례방공동체는 1784년 초, 청나라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이벽의 도움을 받아 조선왕조에 천주교 신앙을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에서 설립했다.
이승훈은 1784년 봄에 귀국한 후 북경의 선교사들로부터 증여받은 여러 종류의 천주교 교리서들을 그와 주1 성호학파 학인들과 함께 수개월간 정독하고 토론한 후, 세례식을 통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전례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공동체의 구성원(신자)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정기적인 모임을 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형조의 주2에게 모임이 발각되어 공동체가 와해되었다. 이것이 1785년 봄에 일어난 을사추조 적발사건(乙巳秋曹 摘發事件, 일명 명례방 사건)이다. 즉 을사추조 적발 사건은 을사년인 1785년에 추조(秋曹, 형조의 별칭)에서 명례방공동체를 적발한 사건을 일컫는다.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闢衛編)』에 따르면 형조의 금리가 김범우의 집에 모인 이들이 노름을 하는 줄 알고 의심하여 들어갔다가,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거동이 해괴하다며 이벽, 이승훈,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정약용, 권일신, 권상문, 김범우 등 10여 인을 체포하였다. 이때 주3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은 김범우만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양반의 자제라 하여 풀어주었다. 김범우는 옥에 갇힌 채 주4를 강요받았고, 이후 충청북도 단양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범우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고, 명례방의 모임은 중단되었다.
을사추조 적발 사건을 겪은 뒤에도 주5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충격이 잦아들자, 이승훈을 중심으로 1786년부터 다시 교회 재건이 시작되었다. 이승훈은 효율적인 선교와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북경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독자적인 주6 조직인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세웠다.
1785년에 명례방공동체가 와해한 때로부터 113년이 지난 1898년 5월 29일, 이곳에는 주7의 장엄한 서울 명동성당(明洞聖堂)이 건립되어 현재까지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물로 있다.
명례방공동체는 세례를 통해 한국천주교회가 1784년에 수표교에서 정식으로 탄생한 이후 가톨릭 신앙의 보급을 목적으로 오늘날 명동성당 일대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창설자 이승훈과 이벽 등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초기 천주교회 교리 학습 공동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