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변계조약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조약이다.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김일성이 '중조변계조약'을 체결하여, 압록강, 두만강 상의 섬과 사주의 분할 근거를 제시했다. 1964년 3월 20일 북경에서 천이(陳毅)와 박성철이 천지분할은 북한이 54.5%, 중국은 45.5% 점유하는 '중조변계의정서'에 서명하였다. 이 의정서로 백두산 천지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한반도 분단 해체 과정에서 고구려사 문제 등의 역사 논쟁과 더불어 간도조약에 기반한 북중국경조약이 논쟁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1712년 강희제(康熙帝)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국경지대를 조사하고, 장백산 천지이남 10여 리 떨어진 분수령(分水嶺)에 정계비를 세웠다. 이 때 정한 경계로 청 왕조와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조중변계조약이 체결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885년~1887년: 청 왕조와 조선의 두 차례에 걸친 국경선 획정 협상의 결렬
1909년 9월 4일: 청과 일본은 ‘두만강 중‧한 계무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 즉 ' 간도조약(間島條約: 간도협약)'을 체결,
1909년 11월 9일: 조선내각총리대신이 이 조약을 비준,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고, 두만강의 발원지는 정계비에서 석을수(石乙水)까지 하기로 합의
1945년 이후: 남북한은 간도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으로 소련,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북한은 만주지역의 조선인과 조중국경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
1950년 초∼한국전쟁 시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신중국은 외국정부와 체결한 조약에 대하여 '승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방침'으로 조중국경문제에 대하여 '일시적 현상유지 방침'을 채택
1955년 6월 8일: 중국 공안부 대표와 북한 내무성 대표의 연석회의에서 중․북 국경 교량의 안전을 위해 안동(단동)-신의주 간 교량에 한해 별도의 의정서를 체결
1955년 11월: 중국-미얀마 양국의 국경수비대 교전에 따라 국경문제 부각
1956년 1월: ‘압록강과 두만강유역 목재운송에 관한 의정서’ 체결
1956년 2월: 중․소 양국의 국경수비대가 신강 이리(新疆 伊犁)의 분쟁지역인 영탑이(英塔爾) 일대에서 서로 경고 사격하는 사건이 발생
1956년: 중공중앙은 국경문제를 회의안건으로 상정
1957년 3월 16일: 저우언라이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중국의 국경문제 해결을 촉구
1957년 8월∼10월: 북한과 소련이 회담을 통해 국경협정을 체결
1958년 4월 25일: 중국 외교부는 국경지역의 성과 자치구에 공문을 보냄
1958년 7월: 저우언라이와 외교부장 천이의 지시에 따라서 중국국무원은 국경위원회를 설립
1958년 12월: ‘중․북 양국 변경지역 상품교역에 관한 의정서’ 체결
1960년 5월: ‘국경하천 운항협조에 관한 협정’ 체결
1960년 3월 14일: 국무원 국경위원회 보고 '1959년 국경 정세: 북중국경문제는 중인분쟁으로 잠정적으로 중단 상태‘
1961년 7월: 저우언라이가 김일성과의 회담 중 "우리의 국경은 획정하기 매우 어렵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
1961년 봄 이후: 중국 동북에서는 조선족들이 대량으로 북한에 불법 월경하는 사건이 발생
1962년 2월 18일: 외무상 박성철은 중국대사 허더칭(郝德靑)에게 내부협상을 통한 중․북 국경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제의
1962년 3월 30일: 저우언라이는 관련 책임자와 중국-북한, 중국-몽고 간 국경문제에 관해 협의하고 국경선 획정문제에 관한 중국측의 초안이 작성, 결정
1962년 4월 10일∼14일: 중국 외교부 부부장 지펑페이(姬鵬飛)와 북한 외무성 부상 유장식을 대표로 하는 중․북 국경회담이 안동(단동)에서 개최
1962년 4월 30일: 중공 중앙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주재 북한대사 한익수에게 "우리는 형제국가이기 때문에 외교가 아닌 내교(內交)를 해야 한다. …… 우리는 동지관계이니 외교가 아닌 내교(內交)를 해야 완전한 동지관계이다"라고 제안
1962년 6월 3일: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 동북국 책임자와 중․북 국경 문제를 협의
1962년 9월 15일: 유장식은 허더칭에게 북한은 중국측의 국경문제 해결방안에 동의하고, 평양에서의 지펑페이(姬鵬飛)와 회담을 제안
1962년 9월 26일∼10월 2일: 지펑페이와 유장식을 단장으로 하는 중․북 대표단이 회담
1962년 10월 3일: 양국 정부대표단의 '중․북 국경문제에 관한 회담기요'에 서명
1962년 10월 11일: 저우언라이와 천이는 북한을 비밀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중조변계조약'을 체결
1962년 11월 7일: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중조변계조약'을 비준하고,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에게 중국정부와의 비준서 교환을 위임
1962년 11월 24일: 천이 주재로 열린 국무원 제122차 전체회의에서 '중조변계조약'이 통과
1963년 6월 28일: 저우언라이는 조선과학원 대표단에게 고구려사 등의 역사문제에 관해 담화
1963년 11월 6일: 중공중앙서기처 서기 캉성(康生)은 선전간부회의의 연설에서 중국사학계에게 북한학자들이 소련과학원에서 편찬한 『세계통사』에 대한 비평논문을 추천하면서 중국 역사학계에 만연한 ‘맹목적인 쇼비니즘’을 질타, 고구려사(연개소문) 문제 거론
1964년 3월 20일: 북경에서 류샤오치(劉少奇)와 저우언라이, 박성철이 참석하여 '중조변계에 관한 의정서'에 서명, 천지분할은 북한이 54.5%, 중국은 45.5% 점유
1964년 5월 5일: 중국과 북한 정부는 새로운 국경조약의 기초 위에 ‘중․북 국경하천 공동 이용관리에 관한 상호협조 협정)’ 체결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 북중국경조약을 구실로 조선족을 박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1972년에는 저우언라이가 미국 대통령 닉슨과의 회담에서 북중국경문제를 설명하였고, 1974년 6월 중국 길림(吉林)성 혁명위원회 외사판공실 편인(編印)의 『중조, 중소, 중몽 유관 조약, 협정, 의정서 회편』이 발간되었다.
1962년 10월 '중조변계조약'과 1964년 3월, 「중조변계조약’에 관한 의정서」의 두 단계로 국경이 확정되었다.
북중국경조약은 중소분쟁, 티베트와 중인분쟁, 북중동맹조약과 북소동맹조약 등의 사회주의권의 분쟁, 그리고 조선족의 북한으로 귀화, 고구려사 등의 역사문제 등을 배경으로 진행되었다. 한반도 분단 해체 과정에서 고구려사문제 등의 역사논쟁과 더불어, 중국은 특히 1909년 9월의 간도조약에 기반한 1964년 북중국경조약이 논쟁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중국 연구자들이 활발히 국경문제를 연구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한국학계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