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미군유해송환회담은 1988년 12월부터 시작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회담에서 비롯되어 2011년 11월 회담에 이르기까지 회담의 형식이나 대화 채널이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1990년 5월 미군유해 5구 송환을 시작으로 미군유해 송환은 1996년 5월 26일 미국 하원의원 리처드슨의 방북 회담을 통해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되는데, 이 회담 이후 미군유해를 북·미가 공동으로 발굴 작업에 합의하였다. 1996년 5월 이전까지는 북한이 미군유해로 추정되는 유해를 발굴해 판문점을 통해 미국에 전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후 2007년 4월 판문점을 통해 송환된 미군 유해 6구를 포함해서 2012년 현재까지 모두 436구의 미군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송환되었다.
6·25전쟁 참전 미군유해송환 문제가 북미사이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1988년 12월 6일중국 북경에서 개최된 북미회담에서 비롯되었다. 1988년 12월 6일 북한의 외교부장 김영남이 레이건행정부 당시 슐츠국무장관에게 보낸 이른바 ‘평화제의 서한’을 접수하는 형식으로 미국과 북한외교관이 북경에서 처음으로 접촉을 가졌다. 1990년까지 8차에 걸친 북경 접촉을 통해 미국은 북한 측에 한국과의 대화에 성의를 보여줄 것, 휴전선일대에서의 대미 악선전 중지, 한국동란참전 미군유해송환, 테러행위 중단 등을 관계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했다. 그리고 미군유해송환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5월 14일 북미간 6·25전쟁 실종미군(MIA) 5명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해 송환키로 합의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군은 6·25전쟁 기간 7,900여 명이 실종됐고 그 중 약 5,500명의 유해가 북한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미 사이에 진행된 6.25전쟁 참가 미군유해송환 회담은 주로 미 국방부[포로·실종자 탐색 사령부(JPAC·Joint POW/MIA Accounting Command)]와 북한의 실무단이 주로 회담을 이어갔지만, 미국 의회 의원, 주지사, 전직 대통령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회담이 전개되었다.
미군 유해 송환 관련 최초의 회담은 1990년 4월 26일 북·미 관계정상화를 위한 제8차 참사관급 외교접촉(중국 북경)인 것으로 알려졌다. 첫 회담 이후 20여 차례의 공식·비공식 회담이 진행되었다. 중요한 회담을 살펴보면, 1991년 6월 24일판문점에서 로버트 스미스(Robert Smith) 미 상원의원과 이성호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대외문화연락협회 부위원장 사이에 진행된 회담에서 「미군유해의 추가송환 및 발굴을 위한 북한미공동위원회」구성이 합의되었다. 이후 1991년 2회, 1993년 2회의 북·미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1993년 8월 24일 회담에서는 북·미 ‘미군유해 송환 등에 관한 합의서’가 발효되었다.
북·미간 미군유해송환회담이 전환점을 맞은 시점은 1996년 1월 하와이에서 진행된 회담이었다. 이 회담을 기점으로 비로소 북·미 공동 유해발굴단을 구성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해 5월 26일 평양에서 이어진 회담에서는 북·미 공동 유해 발굴작업 확인뿐만 아니라, 북한이 보존하고 있는 6·25전쟁 자료의 열람과 수집이 허가되는 파격적인 합의가 이루지기도 했다.
2000년대 북·미 미군유해공동 발굴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해마다 북·미 실무대표단이 발굴 작업 전 실무회담을 통해 공동발굴 지역, 규모, 회수, 인원 등 세부 사항들에 합의했다. 특히 2004년 2월 11일 태국 방콕에서 진행된 실무회담에서는 북한에 거주하는 미국인의 근황을 체크하는 관리를 임명하는데 양국이 동의하기도 했다. 2005년 2월 16일 미 국방부는 2005년 미군 유해 발굴 사업이 4월에 진행될 예정이며 역대 최대규모가 될 것임을 발표했지만, 같은 해 5월 부시행정부의 미군유해발굴작업에 참여하는 미군의 안전을 위해 작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2005년 발굴작업 중단 이후 2007년 4월 8일부터 11일까지 미국 빌 리처드슨(William Blaine Richardson) 뉴멕시코 주지사와 빅터 차(Victor Cha)국가안보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 아시아 담당 보좌관 등 합동대표단이 실종미군 유해 반환 협상차 평양을 방문했고, 미군 유해 6구가 송환되면서 북·미간에 대화의 가능성이 조성되었다.
3년 정도의 공백기를 지나서 2010년 1월 27일 북한이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미군 유해 발굴사업 재개를 제안했고, 2011년 10월 18일 태국 방콕에서 미군유해송환 회담이 재개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 평안북도 운산군과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발굴 작업이 예정되었지만, 2012년 4월 21일 미국 국방부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인공위성)’ 발사 계획과 관련해 “로켓 발사 계획을 포함한 북한의 최근 도발적 행동 때문에, 한국전 때 희생당한 미군의 유해 발굴팀을 북한에 이달 중 보내려던 계획을 우선 중단”한다고 선언하면서 사업은 재개되지 못했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미군유해송환 회담 및 협상결과 2007년 4월까지 모두 436구의 미군유해가 송환되었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 송환된 208구는 북한이 단독발굴해서 미군에 인도했고, 1996년 이후 2005년까지 222구는 북·미 공동 미군유해발굴단이 구성되어 공동으로 발굴한 실적이다. 2005년 부시행정부의 공동발굴단 철수 이후 2007년 4월 미국 빌 리처드슨(William Blaine Richardson) 뉴멕시코 주지사와 빅터 차(Victor Cha)국가안보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 아시아 담당 보좌관등 합동대표단이 실종 미군유해 반환 협상후 미군 유해 6구가 송환되었다.
〈표 1〉 미군유해 송환 현황
북한 단독 발굴 208구 | 북·미 공동 발굴 222구 | 인수 | 계 | |||||||||||||
90 | 91 | 92 | 93 | 94 | 96 | 97 | 98 | 99 | 00 | 01 | 02 | 03 | 04 | 05 | 07 | |
5 | 11 | 30 | 148 | 14 | 1 | 6 | 22 | 13 | 65 | 45 | 26 | 8 | 34 | 2 | 6 | 436 |
출처: 『군사정전위원회편람』제8집 (합동참모본부, 2010)
북한과 미국은 미군유해송환이 인도적인 입장에서 진행되는 사업이라는 점은 상호인정했다. 그러나 양국간의 정치적·외교적 관계 변화에 따라 미군유해송환에 필요한 회담이나 발굴 작업이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과정이 되풀이 되었다. 따라서 북·미 관계개선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향후 미군유해송환은 과거의 경험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