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북·미 미군유해 송환회담은 6·25전쟁에 참가하여 희생된 미군의 유해 송환을 위해 1990년 5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진행된 회담이다. 1988년 12월 북경에서 개최된 북미회담에서 참전 미군 유해 송환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양국 간 미군 유해 송환 회담 및 협상 결과 2007년 4월까지 모두 436구의 미군 유해가 송환되었다. 3년 정도 공백기가 지난 2010년 북한이 미군 유해 발굴사업 재개를 제안하여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2012년 북한의 장거리 로켓(인공 위성) 발사 계획으로 인해 사업 중단이 선언되면서 재개되지 못했다.
정의
6·25전쟁에 참가하여 희생된 미군의 유해 송환을 위해 1990년 5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북한과 미국사이에 진행된 회담.
개설
역사적 배경
경과
미군 유해 송환 관련 최초의 회담은 1990년 4월 26일 북 · 미 관계정상화를 위한 제8차 참사관급 외교접촉(중국 북경)인 것으로 알려졌다. 첫 회담 이후 20여 차례의 공식 · 비공식 회담이 진행되었다. 중요한 회담을 살펴보면, 1991년 6월 24일 판문점에서 로버트 스미스(Robert Smith) 미 상원의원과 이성호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대외문화연락협회 부위원장 사이에 진행된 회담에서 「미군유해의 추가송환 및 발굴을 위한 북한미공동위원회」 구성이 합의되었다. 이후 1991년 2회, 1993년 2회의 북 · 미간 협상이 진행되었고, 1993년 8월 24일 회담에서는 북 · 미 ‘미군유해 송환 등에 관한 합의서’가 발효되었다.
북 · 미 간 미군유해 송환회담이 전환점을 맞은 시점은 1996년 1월 하와이에서 진행된 회담이었다. 이 회담을 기점으로 비로소 북 · 미 공동 유해발굴단을 구성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해 5월 26일 평양에서 이어진 회담에서는 북 · 미 공동 유해 발굴작업 확인뿐만 아니라, 북한이 보존하고 있는 6·25전쟁 자료의 열람과 수집이 허가되는 파격적인 합의가 이루지기도 했다.
2000년대 북 · 미 미군유해 공동발굴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해마다 북 · 미 실무대표단이 발굴 작업 전 실무회담을 통해 공동발굴 지역, 규모, 회수, 인원 등 세부 사항들에 합의했다. 특히 2004년 2월 11일 태국 방콕에서 진행된 실무회담에서는 북한에 거주하는 미국인의 근황을 체크하는 관리를 임명하는 데 양국이 동의하기도 했다. 2005년 2월 16일 미 국방부는 2005년 미군 유해 발굴 사업이 4월에 진행될 예정이며 역대 최대 규모가 될 것임을 발표했지만, 같은 해 5월 부시행정부의 미군유해 발굴작업에 참여하는 미군의 안전을 위해 작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2005년 발굴작업 중단 이후 2007년 4월 8일부터 11일까지 미국 빌 리처드슨(William Blaine Richardson) 뉴멕시코 주지사와 빅터 차(Victor Cha) 국가안보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 아시아 담당 보좌관 등 합동대표단이 실종미군 유해 반환 협상차 평양을 방문했고, 미군 유해 6구가 송환되면서 북 · 미 간에 대화의 가능성이 조성되었다.
3년 정도의 공백기를 지나서 2010년 1월 27일 북한이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미군 유해 발굴사업 재개를 제안했고, 2011년 10월 18일 태국 방콕에서 미군유해 송환회담이 재개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 평안북도 운산군과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발굴작업이 예정되었지만, 2012년 4월 21일 미국 국방부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인공위성)’ 발사 계획과 관련해 “로켓 발사 계획을 포함한 북한의 최근 도발적 행동 때문에, 한국전 때 희생당한 미군의 유해 발굴팀을 북한에 이달 중 보내려던 계획을 우선 중단”한다고 선언하면서 사업은 재개되지 못했다.
결과
〈표 1〉 미군유해 송환 현황
| 북한 단독 발굴 208구 | 북 · 미 공동 발굴 222구 | 인수 | 계 | |||||||||||||
| 90 | 91 | 92 | 93 | 94 | 96 | 97 | 98 | 99 | 00 | 01 | 02 | 03 | 04 | 05 | 07 | |
| 5 | 11 | 30 | 148 | 14 | 1 | 6 | 22 | 13 | 65 | 45 | 26 | 8 | 34 | 2 | 6 | 436 |
출처: 『군사정전위원회편람』제8집 (합동참모본부, 2010)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북한총람』(북한연구소, 2011)
- 『군사정전위원회편람』제8집 (합동참모본부, 2010)
- 『북한개요 2009』(통일부, 2009)
- 『2008 국방백서』(국방부, 2009)
- 「북-미 관계정상화의 국내정치적 제약」(서보혁, 제3회『사회연구』학술상 수상논문, 2003)
- 『신동아』(2000.8)
- 『한겨레신문』(2012.3.23, 2007.4.5, 1993.9.14, 1992.5.14, 1991.11.28)
- 『연합뉴스』(2011.10.18)
- 『동아일보』(2010.1.29)
- 『세계일보』(2005.2.17)
- 『한국일보』(2004.2.14)
- 『서울신문』(1990.5.15)
- 『조선중앙통신』(199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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