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20일 금강산관광 중 남측 여성관광객이 북측 안내원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귀순공작을 이유로 북한에 의해 억류되면서 금강산관광이 일시 중단되었다. 동년 7월 30일 남측의 현대아산과 북측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베이징(北京)에서 관광세칙과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를 체결했고, 다음 달 8월 5일부터 금강산관광이 재개되었다.
북한이 고향인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89년 방북해 ‘금강산관광개발 의정서’, ‘금강산관광을 위한 계약서’, ‘금강산관광을 위한 부속계약서’ 등을 체결하고 정부에 금강산관광 사업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사업승인이 이뤄지지 못했다. 1998년 대북 포용정책을 천명한 김대중 정부가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화해협력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일환으로 현대그룹이 추진한 금강산관광을 승인하면서 금강산관광이 본격화되었다.
1998년 11월 18일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면서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1999년 2월 28일에 금강산 온정리 휴게소와 금강산 문화회관 준공식을 갖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관광을 실행한 지 7개월도 안 돼 남측 관광객이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99년 6월 21일 남측 여성관광객 한 명이 금강산관광 중 북측 안내원과 대화를 나누다가 귀순자 문제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북한에 억류되었다. 이에 우리 정부는 금강산관광 일시중단을 조치하고 관광객 신변안전에 대한 개선조치 없이는 관광을 재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억류되었던 여성관광객은 6일 후에 풀려났으나 금강산관광은 곧바로 재개되지 않았다. 금강산관광을 담당하고 있는 남측의 현대아산과 북측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간에 협의가 진행되었고, 1999년 7월 30일 베이징에서 ‘관광세칙’과 ‘금강산관광객의 신변안전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었다. 그리고 8월 5일부터 금강산관광이 재개되었다.
금강산관광객 억류사건 이후 현대아산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합의한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는 첫째, 분쟁이 생길 경우 각 3∼4명으로 금강산관광사업 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둘째, 문제 발언을 한 관광객은 관광선으로 추방하며, 셋째, 강력한 형사사건 등 엄중한 사건인 경우에는 조정위원회에서 협의 처리하고, 넷째, 그래도 원만히 처리되지 않을 경우 조정위와 북쪽의 해당기관이 협의 처리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정부는 사업자 간 합의가 아니라 당국 간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999년 7월 1일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남북차관급회담’에서 남북 왕래인원의 신변안전보장 문제를 협의․조정하기 위한 ‘신변안전보장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의했으나 북측의 소극적 태도로 의견 접근을 보지는 못하였다. 2000년 이후 남북 당국 간 대화가 재개되자 우리 정부는 북한을 방문하는 남측 인원의 신변안전에 관한 협의를 추진했다. 2002년 12월에 진행된 ‘남북경제협력제도 실무위원회’에서부터 본격적인 협의가 시작되었으며, 2004년 1월 29일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 지구 출입 및 체류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었다.
금강산관광객 억류사건은 남북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신변안전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당국 간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주었고 이후 남북 정부 간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 지구 출입 및 체류에 관한 합의서’ 체결이라는 실질적 성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08년 7월 금강산관광객 피격 사망사건과 2009년 3월 30일 개성공단 내 현대아산 근로자 억류사건이 발생하면서 합의서 개정의 필요성이 다시 재개되었다. 2010년 2월 개성에서 당국 간 실무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진전 없이 종료되었고 현재까지도 금강산관광은 중단된 상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