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8월 말과 9월 초 서울․경기․충청 일대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최악의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자 북한은 남한 수재민들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를 해왔다. 남한의 전두환 정부가 북한의 제의를 수락하면서 수재물자 제공을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이 이뤄졌고 동년 9월 말, 북한의 수재물자가 판문점과 인천항, 강원도 북평항에 도착했다.
1984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서울과 경기, 충청 일대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나고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서울의 하루 최다 강우량은 294.8㎜로 기상대(현재의 기상청) 창설 이후 최고 기록을 세웠다.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었고 한강대교 등 4개의 차량통행이 전면 통제되었으며 저지대인 강동구 풍납동과 성내동 등지의 주택들이 물에 잠겼고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국적으로는 사망 및 실종 189명, 이재민 35만 1,000명, 부상 153명에 피해액은 1,333억 원에 달했다.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회는 방송을 통해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남한의 이재민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면서 수재물자 품목을 쌀 5만석(石: 180L), 천 50만m, 시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 등으로 자세히 밝혔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제의를 남북대화의 돌파구를 여는 계기로 삼기 위해 ‘대국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로 방침을 정했고, 9월 14일 유창순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북한의 제의를 수락한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을 제의했다.
북한의 수재물자 지원 제의는 전달인 1984년 8월 20일 우리 정부가 제의한 남북 간 교역과 경제협력 제의를 희석시키기 위한 선전 차원의 대응이라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당시 남북관계가 대결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은 자신들의 제의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북한의 제의를 즉각 수용하자 북한은 약속한 물자와 수송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과 협상을 벌였고 중국으로부터 일부 협조를 받는 등 수재물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적십자 실무접촉에서 남북은 수재물자 인도․인수 절차를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였으나 최종적으로 판문점, 인천항, 강원도 북평항을 통해 들여오기로 합의했다.
1984년 9월 29일, 첫 대남 수재물자가 판문점을 통해 도착했다. 총 826명의 북측 인원이 수재물자 인도를 위해 남북적십자회담 중단 12년 만에 처음으로 휴전선을 넘어왔다. 같은 날 강원도 북평항에도 수재물자의 일부인 시멘트가 도착했고, 이튿날 9월 30일에도 북한 선박 장산호가 시멘트를 싣고 인천항 제4부두에 접안했다. 10월 4일까지 육․해로를 통해 북한 적십자의 수재물자가 전달되었고, 남측은 담요, 카세트 라디오, 손목시계, 양복지 등 18개 품목이 든 선물가방 848개를 북한대표들에게 답례품으로 증정했다.
북한의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막혔던 남북 간 대화채널을 다시 여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수재물자 지원절차를 협의하기 위한 실무접촉 과정에서 남북 직통전화가 중단된 지 8년 만에 재가동되었다. 수재물자 인수작업이 끝난 후 우리 정부는 북한에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체육회담, 남북경제회담 등을 제의했고, 1984년 11월 남북경제회담이 이뤄졌다. 1985년 4월 9일에는 북한이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양형섭 명의로 당시 채문식 국회의장 앞으로 ‘남북 불가침 선언’ 채택과 관련한 문제를 논의하자며 남북 간 국회의원회담을 제의해왔다. 동년 5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12년 만에 재개됐으며 9월에는 처음으로 남북 간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와 교류는 1986년 1월 20일, 북한이 모든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북한의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남북관계에서 인도주의의 중요성과 역할을 보여주었고, 그동안 막혔던 남북 간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다시 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