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제네바협정을 통해 북한과 미국은 핵동결에 합의했다. 이후 미국의 관심이 대량살상무기 운반수단인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 및 수출문제로 집중되면서 1996년 4월 북한 미사일문제가 북·미간 협상 테이블에 올려졌다.
냉전의 해체와 함께 시작된 북한의 체제위기와 1994년 김일성주석의 사망에 따른 체제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북한의 대외 군사전략은 기존의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비대칭전략을 보다 강조하면서 핵무기와 더불어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의 역사를 살펴보면, 1993년 5월 노동1호 미사일(550km 비행, 최대 사정거리 1,300km)이 시험 발사되었고, 1998년 8월에는 대포동 1호 미사일(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광명성1호’로 알려진 위성을 탑재한 최대 사정거리 2,200km의 로켓)을 시험발사함으로써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2006년 7월에는 최대사정거리 6,000km의 대포동2호 발사, 2009년 4월에는 인공위성 ‘광명성2호’를 탑재한 최대 사정거리 6,700km 이상으로 추정되는 3단 추진체 ‘은하2호‘가 발사되었다. 최근에는 2012년 4월 ’광명성3호‘ 위성이 '은하3호'에 실려 발사되었다. '은하3호’는 김일성 주석 생일 100주년 기념일인 4월 15일 하루전에 발사되었지만 실패했다.
1994년 제네바(Geneva)합의를 통한 북핵문제 접근 이후, 북·미간 최대의 현안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 및 수출문제였다. 북·미 양국은 경수로 협상 타결직후인 1996년 4월부터 미사일회담을 시작했다. 회담은 2000년 11월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1차[1996.4.20∼21, 베를린(Berlin)], 2차[1997.6.11∼13, 뉴욕(New York)], 3차[1998.10.1∼2, 뉴욕(New York)], 4차[1999.3.29∼30, 평양], 5차[2000.7.10∼12, 콸라룸푸르(Kuala Lumpur)], 6차[2000.11.1∼3, 콸라룸푸르(Kuala Lumpur)].
북한은 초기 협상에서 장거리미사일 수출문제에 한정해 협상을 진행하고자 한 반면, 미국은 개발문제를 포함해 포괄 협상을 추구했다. 북한은 협상에서 “미사일 문제는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 미국이 진실로 미사일 수출을 막으려면 하루빨리 경제제재를 해제하고 미사일 수출중지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회담이 진행되던 1998년 8월 31일 북한의 대포동 1호 미사일이 시험 발사되었다. 이어서 1999년 8월 18일 북한은 미사일 수출문제와 함께 시험발사 문제까지 미국과 협상할 수 있음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자, 미국과 북한은 9월 12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고위급 회담을 통해 대북 경제제재 해제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의 추가 시험발사 중단에 합의했다.
2000년 7월에 진행된 5차 회담에서 북한은 먼저 미사일 수출 중단 대신 3년 동안 매년 10억 달러씩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다섯 차례 진행된 미사일협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양국간 관계 진전과 제반 현안을 포괄적으로 다룰 고위급회담의 필요성이 높아져 갔다.
2000년 9월 27일에서 10월 2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고위급회담에서 양국은 사안별로 개최하던 과거 회담 방식에서 벗어나 북한의 미사일 개발 및 수출중단,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제네바 핵합의 이행 등 양국간의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양측은 또 ‘국제테러에 관한 북·미공동성명’에 합의하고, 2000년 10월 9∼12일 북한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전격 방문했다. 이 사건은 북·미관계 사상초유의 일이었다. 10월 12일 발표된 북·미 공동성명(코뮤니케, Communique)에서 양국은 ①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 ② 양국간 적대관계 청산, 미국의 대북 체제보장 및 경제지원, ③ 한반도 평화체제구축을 위해 4자회담 등 여러 방안 활용, ④ 클린턴(Bill Clinton)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 준비를 위한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 등 북·미간 관계정상화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 했다. 그러나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미국의 대통령 선거와 맞물리는 등 미국 국내문제로 성사되지 못하자 북한 미사일 문제는 표류했다.
2001년 1월 출범한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는 북한 정권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고,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에 착수했다. 2001년 9·11 테러사태는 미국의 안보 특히 핵확산에 대한 우려를 급격히 증대시켰고,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비핵국가에 대한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시사한 2002년 3월‘핵태세 보고서’ 등은 북·미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면서 북한 미사일 협상은 결렬되었다.
북·미간 미사일 협상은 그 자체로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미사일 회담은 양국의 입장차를 확인하는 자리였고, 협상의 진전은 고위급 회담 등 다른 장을 통해 이루어졌다. 북한 미사일 발사 일시 유예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조치에 합의한 1999년 9·12 베를린 합의는 북·미 고위급회담의 결과였고, 조명록 특사의 방북도 뉴욕에서 개최된 2000년 9월 김계관·카트먼(Charles Cartman) 고위급회담에서 합의되었다. 결국 북한과 미국사이의 문제는 각 정부의 최고결정권자가 양국의 문제를 포괄적 접근방식과 정치적 결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