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7월 12일 함경북도 연사(만주 연길 출생이라는 주장도 있음) 출신이다. 1938년경부터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서 전령병, 호위병으로 근무했으며 해방이후 김정숙, 김정일과 웅기항으로 입북하는 등 해방전부터 김일성과 김정일과 함께 고락을 함께했던 빨치산 1세대이다. 만경대혁명학원에서 수학했고, 1950∼1952년 러시아 공군대학 유학후 비행사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1975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80년 당 중앙위 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공군사령관에 취임했다.
이후 1985년 인민군 상장, 1992년 인민군 대장, 1995년 군인·정치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선출되었다. 더불어 1998년 김정일시대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오르면 2인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2010년 11월 6일 심장병으로 사망할 당시 조명록의 공식적인 직함은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국장이자 인민군 차수,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었다.
조명록이 국제사회에서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은 2000년 ‘북미 코뮤니케’를 통해서였다. 한반도 분단 이후 북한의 인사로는 최고위급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북미관계에서 최고수준인 ‘북미 코뮤니케’에 합의했다. 2000년 10월 12일 발표된 ‘북미 코뮤니케’는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서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는 명백한 의사를 밝힌 최초의 외교문서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북·미 두 나라가 국교수립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는 점이고,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다섯 가지 원칙이란 상호 적대관계 청산, 상호 주권존중 및 내정불간섭, 상호 불가침, 상호 경제협력, 미국의 한(조선)반도 통일 지지였다.
2010년 조명록의 사망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장의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2년에는 김일성 훈장 수상으로 비롯 각종 상훈도 수차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