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표지에 행서로 “경산전팔쌍절첩(京山篆八雙絶帖)”이라고 쓴 제첨이 붙어있다. 총 20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면까지는 전서(篆書)로, 그 뒤는 예서(隸書)로 썼다.
전서는 4점으로 당(唐) 백거이(白居易)의 「유분수(游湓水)」, 송(宋) 소식(蘇軾)의 간찰 「여모유첨(與毛維瞻)」, 백거이의 오언시 「증별최오(贈別崔五)」, 당 위응물(韋應物)의 오언시 「용문유조(龍門遊眺)」이다. 예서는 3점으로 위응물의 오언시 「낙도유우(洛都遊寓)」, 당 고적(高適) 오언시 「동설사직제공추제곡강부견남산작(同薛司直諸公秋霽曲江俯見南山作)」, 당 잠삼(岑參)의 오언시 「종남운제정사심법징상인불우귀고관동담석종망진령미우작이우인(終南雲際精舍尋法澄上人不遇歸高冠東潭石淙望秦嶺微雨作貽友人)」이다.
『경산전팔쌍절첩(京山篆八雙絶帖)』은 조선후기의 명필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이 백거이(白居易)의 시와 소식(蘇軾)의 편지글 등을 전서와 예서로 쓴 것이다.
표지의 제첨에 “경산전팔쌍절첩(京山篆八雙絶帖)”이라 씌어있으나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다. ‘경산(京山)’은 이한진의 호이고, ‘전팔(篆八)’은 전서와 팔분(八分: 예서의 이칭)을 가리킨다. 이한진은 전학(篆學)에 뛰어났고 음악에도 통하여 그의 퉁소는 홍대용(洪大容)의 거문고와 함께 짝했다고 한다. 이런 재주로 그는 당대의 명사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성대중(成大中)·홍원섭(洪元燮) 등과 교유했다고 한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두루 잘 썼다.
이 서첩은 전서와 예서로 씌어있고, 대자·중자·소자 등 글씨 크기도 다양하여 이한진 전예(篆隸) 서풍의 면모를 살피기에 좋은 자료이다. 모두 7점이 실려 있는데 전서는 4점으로 당(唐)백거이(白居易)의 오언시 2수를 포함하여 송(宋)소식(蘇軾)이 모유첨(毛維瞻)에게 보낸 간찰과 당위응물(韋應物)의 오언시를 썼고, 예서는 3점으로 위응물·고적(高適)·잠삼(岑參) 등 당인(唐人)의 오언시를 각각 1수씩 썼다. 중간에 소식(蘇軾)의 간찰을 전서로 쓴 필적 말미에 “경술하(庚戌夏)”라고 쓴 간기와 “경산(京山)”·“중운(仲雲)”이라고 새긴 호인과 자인이 찍혀있어 이한진의 나이 59세 되던 1790년(정조 14)에 쓴 필적임을 알 수 있다. 이한진은 앞 시기의 명필인 이인상(李麟祥)과 송문흠(宋文欽)의 전예(篆隸) 서풍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는데, 이 서첩은 현존하는 이한진의 필적 가운데 그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서는 획이 가늘고 굵기가 일정한 당(唐) 이양빙(李陽氷)의 옥저전(玉箸篆) 계통이며, 예서는 동한(東漢)시대 예서비로 유명한 「예기비(禮器碑)」와 「조전비(曹全碑)」가 혼합된 서풍이다.
이 서첩은 전대의 이인상(李麟祥)과 송문흠(宋文欽)의 전예(篆隸) 서풍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이한진의 필적으로, 전서와 예서로 씌어있고 글씨 크기도 다양하여 이한진 전예(篆隸) 서풍의 전모를 살피기에 유용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