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 )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서예
작품
국가유산
정약용(丁若鏞)이 강진 유배시 다산초당(茶山艸堂)의 사경(四景)을 읊은 시와 외척 윤규로(尹奎魯)의 아들에게 준 시문 등을 쓴 서첩.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丁若鏞 行草 茶山四景帖)
분류
기록유산/서간류/서예/서예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2010년 10월 25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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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약용(丁若鏞)이 강진 유배시 다산초당(茶山艸堂)의 사경(四景)을 읊은 시와 외척 윤규로(尹奎魯)의 아들에게 준 시문 등을 쓴 서첩.
구성 및 형식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첩의 필사본으로 대부분 행서로 쓰여 있다. 표지 제첨은 예서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이라 쓰여 있고, 그 밑에 작은 예서 글씨로 “다산친묵 귤송당진장(茶山親墨 橘頌堂珍藏)”이라고 두 줄로 쓰여 있다. 이를 통해 이 서첩을‘ 귤송당(橘頌堂)’이란 당호(堂號)를 가진 인물이 소장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귤송당’은 다산초당이 위치한 곳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橘洞)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귤원(橘園)’이란 아호를 썼던 윤규로의 당호이거나 정약용의 외손과 관련이 있는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경시 뒤로는 윤규로의 넷째 아들 윤종진(尹鍾軫)에게 써준 호기(號記), 윤규로의 셋째와 넷째 아들과 문답한 내용을 쓴 글, 윤종진에게 독서하는 자세에 대해 써준 경계의 글, 윤규로 자제의 재질을 칭송한 오언시, 소식(蘇軾)의 오언율시 「권야(倦夜)」가 쓰여 있다.

내용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조성했던 다산초당의 경물들 가운데 다조(茶竈), 약천(藥泉), 정석(丁石), 석가산(石假山) 등 네 가지 경물을 읊은 칠언율시를 행서로 쓴 서첩이다. 사경 가운데 ‘다조’는 차 끓이던 부뚜막 역할을 하던 바윗돌로 현재 다산초당 앞마당에 놓여있다. ‘약천’은 다산이 평소 떠 마시거나 약을 달일 때 사용하던 샘으로 다산초당 서북쪽 모퉁이에 위치해있다. 원래 물기만 축축이 있던 곳인데 다산이 이곳을 파내자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는 내용이 시의 말미에 적혀있다. ‘정석’은 다산초당의 주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다산 자신의 성을 새긴 명문으로 다산초당 서편 바위에 새겨져 있다. ‘석가산’은 다산초당 오른쪽 연못 중앙에 둥근 형태의 산 모양으로 돌을 쌓아 조성한 곳이다.

다산초당의 사경을 읊은 4수 뒤로는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 윤규로(尹奎魯)의 아들 윤종진(尹鍾軫)이 15세 되던 해인 1818년에 정약용이 그에게 ‘순암(淳菴)’이란 호를 지어주며 써준 호기(號記), 정약용이 유배에서 벗어난 뒤 1823년 초여름 옛 제자이자 윤규로의 셋째(字는 旗叔)와 넷째 아들 윤종진(字는 琴季)이 한강 상류인 다산의 집에 찾아 왔을 때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념으로 써준 글, 윤종진에게 독서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써준 경계의 글, 윤규로 자제의 뛰어난 재질을 칭송한 오언시 등이 행서 또는 행초(行草)로 차례로 쓰여 있으며, 마지막으로 소식(蘇軾)의 오언율시 「권야(倦夜)」를 행초로 썼다.

정약용은 초년에 전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 강세황(姜世晃) 등의 서풍을 따르다가 강진 유배 이후로는 특유의 서풍을 이루었다. 그의 후반기의 글씨는 글자의 크기 및 필획의 굵기에 변화를 주어 자유분방한 필치가 더욱 드러나며, 먹을 듬뿍 먹은 습윤한 운필과 더욱 여유로워진 글자의 짜임을 보인다. 이 서첩에서도 강진 유배시절 이후 변모된 정약용의 서풍을 살필 수 있는데, 1823년(62세) 윤규로의 셋째와 넷째 아들에게 써준 행초 필적에서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시문집 권5에는 다산 팔경을 노래한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와 다산의 정경을 읊은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가 있으나 사경(四景)을 읊은 시는 실려 있지 않다. 문집에 빠져 있는 사경시와 그 대상인 경물들이 현재까지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고, 시의 말미에는 시의 소재로 쓰인 경물들에 대한 위치 및 조성배경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어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지내기 시작하던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유용한 자료이다. 글씨는 행서 또는 초서를 섞은 행초로 쓰여 있는데, 대부분 연대가 기록되어 있고 글씨의 흐름도 각 시기마다 변화를 보여 정약용 행초서풍의 변천과정을 살피기에도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다산사경첩』(강진군, 1996)
집필자
유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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