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6면의 다양한 색지를 사용하여 한 면에 4행 40자씩 썼다.
신위는 1812년(순조 12)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당대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 등을 만났다. 그의 해서는 청나라에 다녀온 뒤로 옹방강 서풍을 따랐고, 행초(行草)에서는 북송 미불(米芾)의 서풍을 애호했으며, 명(明) 동기창(董其昌)의 서풍도 즐겨 썼다.
이 『천자문』은 신위가 69세 되는 1837년(헌종 3) 9월 21일에 썼다. 서첩 표지에는 '천자문(千字文)'이라 쓴 제첨이 왼쪽 상단에 붙어있다. 첫 면에는 “천자문, 양원외산기시랑주흥사차운(千字文, 梁員外散騎侍郞周興嗣次韻)”을 세 줄에 쓰고 천자문 10자를 한 줄에 썼으며, 마지막 면에는 천자문 30자를 3줄에 쓰고 나머지 한 줄에 “정유구월입일일자하육십구수서(丁酉九月卄一日紫霞六十九叟書)”라고 썼다.
서풍은 당(唐) 구양순(歐陽詢)에 바탕을 둔 옹방강과 그의 아들 옹수곤(翁樹昆)과 유사한데, 추사 김정희 역시 1810년 청나라에 다녀온 뒤 한동안 따랐던 서풍이다. 신위의 해서 글씨는 옹방강에 비해 좀 더 부드럽고 단아한 필치를 보인다.
첫 면에는 인영(印影)이 여러 개 있는데, 원래 소장했던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소장인과 근래의 소장자 신효충(申孝忠, 1934∼1986)의 소장인, 그리고 한학자 임창순(任昌淳)·이가원(李家源)과 서예가 김충현(金忠顯)·김응현(金膺顯)·이기우(李基雨)의 감상인이 찍혀 있다. 마지막 면에도 신효충의 당호 “집고헌(集古軒)”이 찍혀 있다.
신위 말년의 해서 필적으로, 청 옹방강의 해서에 바탕을 두다 점차 자신만의 부드럽고 단아한 서풍으로 변모해 간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