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주 대릉원은 본래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노동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황남리고분군, 경주황오리고분군, 경주인왕리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유적의 특성과 역사성을 고려하여 경주 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으로 재지정하였다.
대릉원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서 따온 것이며, 신라시대의 왕,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독특한 무덤군이다. 그 중 서봉황대고분과 금관총은 1921년, 금령총과 식리총은 1924년, 서봉총은 1926년 일제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광복 이후 1946년호우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1953년마총, 1963년쌍상총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73년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경주 노동동 고분군은 현재 4기(제125∼127호)가 남아 있다. 봉황대는 황남동 제98호분보다 낮으나, 봉토의 지름 82m, 높이 22m의 거대한 고분이다. 그 남쪽 15m 지점에는 1924년에 발굴한 금령총(金鈴塚)이 있고, 그 동쪽에는 같은 해에 발굴한 식리총(飾履塚)이 있으며, 그 서쪽에 노서리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군은 노서리 고분군과 같이 황남리 고분군보다는 조성연대가 조금 뒤인 6세기경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구조는 모두가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돌무지 덧널 무덤은 널의 위치에 따라 지상식과 지하식, 반 지하식이 있는데 대부분 지하식으로 구덩이를 파서 덧널을 넣고 덧널 안에 나무널과 유물을 넣어 수장하였으며, 덧널 위에 돌을 쌓은 후 봉토를 덮은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추가장과 도굴이 어려워 매장 당시의 유구가 잘 남아 있게 된다.
경주 노서동 고분군은 표형분(瓢形墳) 1기(제134호분)를 포함하여 14기(제128∼141호)의 고분이 있다. 이 중에는 서봉황대(西鳳凰臺) 고분을 비롯하여, 1921년에 발굴된 금관총, 1926년에 발굴된 서봉총(瑞鳳塚)과 같은 유명한 고분과 1946년에 발굴된 호우총(壺杅塚: 제140호분)도 있다. 또 1953년에 발굴된 제133호분 마총(馬塚)과 1963년에 발굴된 제137호분 쌍상총(雙床塚)이 있다. 쌍상총은 석실 넓이 3m, 높이 4m로 남쪽 벽에 두 쪽 돌문이 달린 널길[羡道]과 통하고, 실내에는 2.3m×2m, 높이 1m의 관대(棺臺)를 중앙에 만들고 인형을 음각한 석제 시대(屍臺)와 돌베개, 족좌(足座)가 나란히 놓여 있어 부부 합장 분묘로 추정된다.
마총은 완전히 도굴당한 상태였지만 내부에서 말 뼈가 발견되어 그렇게 명명하였고, 현실과 널길 사이에는 돌문이 아니라 나무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이들 석실분은 경주의 평지 대지에 나타난 가장 초기의 새 형식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며, 연대는 신라∼통일신라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경주 황남동 고분군에는 미추왕릉(味鄒王陵)이라 전하는 고분을 비롯하여 이미 지정된 고분과 그 후 새로 소재가 파악된 173기를 더하여 250여 기의 파손된 고분들이 있다. 이 중에 미추왕릉군을 1973∼1974년미추왕릉 고분공원으로 조성하여 돌담을 둘러쳐 보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화문옻칠그릇[畵文漆器] 등과, 부인띠[夫人帶]로서 침각명(針刻銘)이 있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 꾸미개 등 많은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1973년에 발굴된 제155호분 천마총(天馬塚)에서도 화려한 금관 등의 금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경주 황오동 고분군은 경주의 팔우정(八友亭) 로터리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48기(제1∼18호, 제30∼58호)의 고분들이다. 이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분에는 1935년에 발굴된 제16호분, 1934년의 제14호분, 1965년의 제1 ·33 ·151호분과 1963년의 제4·5호분이 있다. 이 고분들도 황남동의 고분과 마찬가지로 대개 다곽분(多槨墳)이고, 제14호분에서 출토된 철제 등자는 고신라의 등자 중에서도 고식(古式)에 속한다. 특히 제151호분은 한 봉토 안에 남북방으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동서쪽으로 직사각형 돌방[石室]과 함께 들어 있어, 보문리 부부총과 더불어 특이한 구조를 취하였다.
경주 인왕동 고분군은 경주역 동쪽의 대부분이 도굴되거나 파괴된 고분 23기(제19∼27호분, 제147∼150호분 및 새로 발견한 10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고분 중에서 1969년 제19·20호분은 경희대학교박물관이 발굴하였고, 1973년에 제149 ·156호분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 발굴했다. 제19호분은 13개의 돌덧널이 드러나서, 5∼6세기의 약 2세기에 걸친 가족공동묘지로 추정되었다. 이것은 신라 때의 일반적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었다. 껴묻거리[副葬品]로는 토기, 장신구, 마구류와 은제환두대도, 투겁창 등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고분은 신라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고신라시기의 신라 왕과 귀족들의 무덤군이다. 무덤의 양식은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축조기법상의 문제로 도굴이 어려워 대부분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부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금관과 과대 용기류 등 금속유물을 비록하여 수많은 토기와 생활용품이 출토되어 고신라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