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마로산성은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시기에 초축된 협축식 성곽이다. 2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마로산 정상에 축성되었는데 백제에 의해 초축되어 통일신라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산성은 둘레가 550m, 폭은 5.5m, 외벽의 높이는 3∼5m이다. 이곳에서 성벽과 건물지 17동, 문지 3개소 및 유구와 기와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마로관이 새겨진 평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마로현이 치소였다는 역사 기록과 일치한다. 이는 산성이 군사적인 기능뿐 아니라 행정치소의 기능을 했음을 입증하는 근거 자료이다.
마로산성은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광양만과 순천왜성이 있고, 북서쪽으로는 광양읍이, 남쪽으로는 남해고속도로가 한눈에 보이고 남서쪽 약 6.7km 지점에는 순천 검단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마로현(馬老縣)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데, 광양이 백제시대의 마로현이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가 550m이고 성벽의 폭은 5.5m, 외벽의 높이는 3∼5m이다. 성벽은 석비레층이나 암반 위까지 파고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협축식(夾築式)으로 쌓았으며 면석은 장방형이나 부정형의 할석을 이용하여 수직에 가까운 기울기로 쌓았다. 성돌의 크기는 상하 석재에 차이가 거의 없으며 들여쌓기를 하지는 않았다. 또한 외벽보다 내벽을 거칠게 쌓았으며 북벽에서는 외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저부에서 1m 정도 높이까지 점토로 다짐하기도 하였다.
문지는 남문지와 동문지, 서문지 등 3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능선 쪽에 위치하면서 능선을 약간 비켜선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문의 형태는 개거식(開拒式)이며 문의 너비는 5m 내외이다. 남문터와 동문터의 개구부에는 2열의 주공열이 확인되어 굴립주(掘立柱)식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치성(雉城)은 성의 북쪽에 3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성벽을 쌓은 다음 덧붙여서 축조하였는데 체성의 성돌과 치석방법이 달라 통일신라시대에 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 17개소는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것이고 일부가 백제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중 성의 남쪽 경사지를 이용하여 축조한 2개의 석벽 건물터가 가장 상태가 양호한데 사각추 형태로 가공한 성돌이 사용되고, 바닥에서 탄화미가 다량 수습되어 군량미를 보관한 창고로 추정되는데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집수시설은 모두 11개소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5개소는 석축 집수시설이고 6개소는 점토 집수시설이다. 석축 집수시설은 부정형의 할석으로 축조한 것이 1기이고 가공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한 것이 2개소이며, 방형 석축 집수시설이 2개소이다. 점토 집수정은 생토면을 굴착한 후 회흑색의 점토를 두껍게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하였다.
출토유물은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류, 철기류, 청동기류 및 ‘마로관(馬老官)’, ‘군역관(軍易官)‘ 등의 명문기와를 포함한 기와류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마로산성은 가공하지 않은 할석으로 쌓은 백제의 체성벽과 성내에서 가공한 석재로 쌓은 통일신라시기의 집수시설과 건물지가 확인되어 석재 가공기술의 변화양상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성내부의 유구가 잘 남아 있어 성내의 공간 활용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마로관(馬老官)이 새겨진 평기와가 출토되어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이 지역이 마로현이 치소였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 산성의 역사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산성이 단순히 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행정치소의 기능을 하였음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근거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