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해주의 부사호(副司戶)였다. 모두 3차례 결혼하여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해주의 향리(鄕吏) 가문 출신이다. 서울에 올라와 1189년(명종 1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대학에 들어간 뒤 1194년(명종 24) 예부시(禮部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과거에 응시할 때, 꿈에 거북이 한 마리를 잡았으므로 임시로 이름을 일구(一龜)라 하였는데, 합격자를 발표하기 하루 전에 시험관이 거북 한 마리가 나타나 자신만이 버림을 받았다는 하소연하는 꿈을 꾸고 버려진 답안지를 다시 검토한 결과 병과의 우두머리로 합격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이 과거의 지공거(知貢擧)는 추밀원사(樞密院使) 최유가(崔瑜賈)이고 동지공거(同知貢擧)는 판비서사(判秘書事) 최선(崔詵)이다.
1206년(희종 2)에 박주통판(博州通判)이 되었다. 이후 연희궁녹사(延禧宮錄事), 상서도사(尙書都事), 권지각문지후(權知閣門祗侯), 지고부군사(知高阜郡事),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 상승봉어(尙乘奉御),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을 거쳐 5품직인 시예부·공부낭중(試禮部工部郎中)에 올랐다. 1238년(고종 25)에 71세로 사망하자 사마시 동년(同年) 급제생인 이규보(李奎報)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