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경기도 파평시 파평면). 자(字)는 자기(子奇).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소부윤(少府尹) 윤암(尹諳)이며, 어머니는 판삼사사(判三司事) 박지량(朴之亮)의 딸이다.
14세인 1320년(충숙왕 7)에 문음(門蔭)으로 주릉직(周陵直)에 임명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 정4품인 흥위위 정용호군(興威衛 精勇護軍)이 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3)에는 친어군 호군(親禦軍 護軍)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감시주사(監試主司) 민사평(閔思平)의 종들이 반주(班主) 인안(印安)을 폭행한 일로 왕이 민사평의 집을 허물려고 하자 이를 말렸다.
이후 삼사좌윤(三司左尹)을 거쳐 보흥고(寶興庫)의 관리로 재직하면서 회계처리를 엄정하게 하여 칭송받았다. 1349년(충정왕 1)에 다수의 추천으로 대신(臺臣: 臺官)으로 선발되어 집의(執義)로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명성을 떨쳤다. 1350년(충정왕 2)에 판소부시사 지전법사사(判少府寺事 知典法司事)가 되었다. 1355년(공민왕 4)에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거쳐 복주(福州, 경상북도 안동시) 목사(牧使)가 되어 임지에 나아갔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왕이 복주로 피난하자, 필마(匹馬)로 왕을 수행하면서 경상도 점군병마사(慶尙道 點軍兵馬使)가 되었다. 이어 서울을 수복한 뒤 경성수복2등공신(京城收復二等功臣)에 책봉되었다. 1364년(공민왕 13) 봉익대부 판전의시사(奉翊大夫 判典儀寺事)가 되었으며 1372년(공민왕 21)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1374년(우왕 즉위년) 파평군(坡平君)에 책봉되었고 관계(官階)는 대광(大匡)이 주어졌다. 1376년(우왕 2)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이듬해 송림현(松林縣)에 장례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