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면. 1973년 민음사에서 발행하였다. 서문 대신 「순례의 서」가 실려 있고, ‘순례’, ‘속·순례’, ‘서(序)’, ‘유년기’, ‘단장’, ‘장시’의 5부로 나뉘어 42편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본문 뒤에 김현의 발문과 오규원의 후기가 실려 있고, 김승옥이 장정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순례』는 오규원의 두 번째 시집으로서 첫 시집 『분명한 사건』(1971)과 함께 초기시에 해당한다.『분명한 사건』이 순수한 언어와 투명한 심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면, 『순례』는 순수 언어와 추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과의 접목을 꾀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그것은「개봉동과 장미」, 「고향 사람들」, 「단장 1」처럼 구체적인 현실 공간이 배경이 되는 시들에서 잘 나타난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순례」 연작시는 자신의 시적 여정을 성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적 화자인 ‘나’는 여전히 추상과 내면적인 공간 속에 머무르고 있지만 외부의 풍경이 시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첫 시집과는 구별된다. 시인은 풍경을 따라가며 자신의 창작 방향과 주제를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나’의 의식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순례의 여정은 어둡고(「어둠의 힘-순례 16」) 자주 죽음 쪽으로 기울어진다(「그리고 우리는-순례10」). 그러나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순례 서」에서의 다짐은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중략)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순례11」)이라는 주체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그의 시가 현실의 세계로 열려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집은 오규원 시의 원형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요한다. 「순례 서」, 「비가 와도 젖은 자는-순례1」 등은 후기시의 중요한 주제인 ‘날이미지시’와 연계되고, 소설가 이상을 소재로 해서 시인의 몽환적인 독백을 보여주는 「김씨의 마을」은 중기시의 패러디 수법이 초기 시부터 시도되어왔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순례』는 이후의 오규원 시의 다양한 변모를 담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