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는 해방 이후 「안개」, 『입 속의 검은 잎』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하고, 1985년 연세대학교 정치학부를 졸업하였다. 1985년 시 「안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1986년 《중앙일보》 문화부로 자리를 옮기고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3월 사망했으며, 5월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다. 기형도의 시는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를 드러내고 분석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의 시는 대부분 우울과 비관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현실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 출생.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은 황해도였으나 한국전쟁 중 연평도로 건너왔다. 1964년 일가족이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이사했다. 당시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로 도시 근교 농업이 성한 농촌이었다. 1967년 시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성실한 부친 덕분에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다.
1969년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가계가 기울어 모친이 생계를 꾸리게 되었다. 1973년 신림중학교에 입학했고, 1975년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76년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교내 중창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79년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했다. 교내 문학 서클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 · 시상하는 〈박영준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 입선되었다.
1980년 정법계열에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했다. ‘80년의 봄’을 맞아 철야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하고 교내지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했다가 조사를 받았다.
1981년 병역 관계로 휴학하고 대구 · 부산 등지를 여행했으며, 방위로 소집되어 안양 인근 부대에서 근무했다. 안양의 문학 동인인 〈수리〉에 참여해서 동인지에 「사강리」등을 발표했다. 시작에 몰두하여 초기작의 대부분을 이 때 쓰고 습작을 정리했다.
1982년 전역하여 양돈 등 집안일을 도우면서 창작과 독서에 몰두했다. 이 때 「겨울 판화」, 「포도밭 묘지」, 「폭풍의언덕」 등 다수의 시와 소설을 썼다.
1983년 3학년으로 복학하고,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 · 시상하는 〈윤동주문학상〉에 시 「식목제」로 당선되었다.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하고, 1985년 시 「안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2월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수습 후 정치부로 배속되었다.
1986년 문화부로 자리를 옮기고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문학과 출판을 담당하면서 관련 인사와 활발하게 교유했다. 1987년 여름에 유럽을 여행하고, 1988년 여름휴가 동안 대구 · 전남 등지로 여행했다.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자리를 옮겼다.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3월 9일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5월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0년 1주기를 맞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살림출판사에서 출간했다.
기형도의 시는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를 드러내고 분석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아픈 아버지, 장사하는 어머니, 직장을 다니는 누이 등 어두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의 시의 원체험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시는 우울과 비관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개인적인 체험 외에 정치 사회적인 억압이 간접적인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개」는 억압적 현실 속에 개체화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고, 「전문가」, 「홀린 사람」 등은 기만적인 정치 현실과 무력하게 그것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풍자함으로써 간접적인 사회 비판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극히 비관적이며 어떠한 전망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