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하였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로 등단한 기형도의 유고 시집으로서, 3부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집에 실린 기형도의 시들은 대부분 우울하고 어둡고, 외로움과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의 시의 어둠의 바탕은, 시의 내용상 일차적으로 유년의 가난함과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엄마 걱정」)이라는 시의 부분은 가난한 어린 시절 집안 환경과 그 속에서 자란 화자의 외로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병으로 앓고 있고 대신 어머니가 일을 하고 누이가 공장에서 야근을 하는 환경에서도, 화자는 반장을 하고 상장을 받아오지만 그것들은 현실 속에서 무의미한 일들이 되고 만다(「위험한 가계 1969」). 가난으로 마음까지 황폐해진 가족과 가까운 친지의 죽음은 화자를 더욱 어둠과 불안에 갇히게 한다. 그 중에서도 ‘무능력한 아버지’는 기형도 시의 중요한 출발점이며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기도 하다(「너무 큰 등받이 의자」, 「물 속의 사막」).
성인 화자가 등장하는 시들 또한 성장한 화자가 등장할 뿐, 우울과 슬픔, 불안의 분위기는 변하지 않고 계속된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이별은 성인 화자가 겪는 삶의 또 다른 아픔이다(「그집 앞」).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빈 집」)에서 보이는 쓸쓸함은 낭만적인 상실감을 그려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단지 남녀 간의 이별이 아니라 ‘창밖을 떠돈 겨울 안개’와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로 상징되는 공포와 불안이 내재해 있다. 이것은 등단작 「안개」의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걸린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나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 공기’와 같은 낯설고 감각적인 이미지들로서, 불길하고 괴이한 느낌을 준다. 우울이나 외로움은 단지 서정적 자아의 감정 표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불길함과 더불어 있다. 화자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채 자주 죽음에 사로잡힌다(“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오래된 서적」). 그러나 이러한 괴이한 느낌들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개인의 특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져 있는 억압과 공포를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그로테스크함이 사회적인 현실과 결합될 때 기형도의 시는 「전문가」, 「홀린 사람」, 「입 속의 검은 잎」과 같이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전문가」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길들여지는 개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홀린 사람」은 거짓이 판치는 세상과 우매한 군중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으며, 「입 속의 검은 잎」은 권력자의 죽음과 공포, 앞을 알 수 없는 불안을 그리고 있다. 이 시들은 현실적인 분명한 맥락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억압된 세상에서 예상될 수 있는 일들을 풍자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사회 비판적인 성격을 갖는다.
기형도의 시는 독특한 감각과 현실비판적 요소를 두루 갖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김현)이라고 불리운다. 이것은 기형도의 시가 개인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우울하고 섬세한 감수성으로 일상 곳곳에 퍼져 있는 폭력과 억압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