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하였다.
195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바람」으로 등단한 이성부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성부의 시는 여성적인 가냘픔과 섬세함이 주류를 이루어온 한국 시단에서, 남성적인 강인함과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이성부의 시는 세련된 수사와 심오한 깊이 대신 직정적이고 간결하며 호소력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쉽게 읽힌다.
이전 시집의 시들과 비교할 때, 『백제행』에는 종종 현실의 어둠과 고통, 그것으로 인한 공포, 삭막함과 절망이 드러난다(“벌판에는 오직 한 사람이 산다./ 밤에도 불 켜지 않는다./ 물도 없이/ 한 조각 마른 떡도 없이/ 까칠한 수염 날리며/ 밤새도록 검은 늑대의 울음을 운다.”-「벌판」). 화자는 “눈감아 귀 기울여도/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뿐/ 밤 하늘 떠도는 혼들의/ 달음박질 소리뿐!”(「노래」)에서처럼 공포에 휩싸이기도 하고, “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들 외로움만 쥐어뜯는가./ 감싸 주어도 좋을 상처, / 더 피흘리게 만드는가./ 쌓인 노여움들/ 요란한 소리들/ 거듭 뭉치어/ 밖으로 밖으로 넘치지도 못한 채……”(「만날 때마다」)에서처럼 ‘우리’에 대한 실망과 한탄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시인 개인만이 아니라 1970년대 현실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문득 자신의 얼굴을 낯설게 느끼거나(「노(奴)」), 스스로의 몸뚱이를 ‘무엇에 굶주린 짐승 같다’(「백제」)고 여기고, 고향에 내려가도 고향 흙조차 “고향의 다순 살결은 끝내 아니다”(「노래」)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폭력과 억압이 극에 달해가는 유신 정권하의 삶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소외의 질곡과 고통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데서만 그치지 않고, 소외의 현실을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견디고 있다는 연대성의 확인(“혼자만 아는 외로움도/ 혼자서 부딪치는 그리움도/ 모두 다 같은 외로움, / 같은 그리움인 것을.” -「집」)을 통해서 소외를 극복하고 사랑을 실현하리라는 굳은 낙관을 간직하고 있다.
덕분에 대부분의 시들은 절망을 그리면서도 그것이 빼앗아갈 수 없는 희망을 긍정하는 것으로 끝난다(“서울의 헛간 깊숙한 곳,/ 어떤 절망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이 손시린 사랑 위에/ 피흘림 위에// 스스로 옷벗은 빛이 내린다./ 이슬 안개 받아먹고/ 저 혼자 자란 빛이 내린다.”(「노래」). 이러한 긍정의식은 그의 시 맨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우리들 한복판에서/ 늘 우리들 모습을 새로 만드는/ 슬픔, / 우리가 그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깨진 무르팍 호호 불고/ 흙먼지 털털 털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게 만들어야 한다.”(「우리들 시(詩)」).
시 「백제행」은 이러한 믿음이 역사적인 시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목마른 대지의 입술 하나, / 이 찬물 한 모금,/ 죽은 듯 다시 엎디어 흙에 볼을 비벼 보네./ 해는 기울어/ 쫓기는 남편은 어찌 됐을까? (……)/ 먼 데서 가까이서/ 더 큰 해일을 거느리고 사랑을 거느리고/ 아아 기다리던 사람들의/ 돌아오는 소리 들려오네.”에서, 이 시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면에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서사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흙’은 역사적 공간인 조국의 국토를 암시하고, ‘사람들’ 또한 역사적 시간 속의 민족 전체로 확장된다.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은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드러내면서도 서정성과 현실 비판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역사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