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연 21행의 자유시이다. 1933년『중앙』11월호에 실린 시로서 1930년대 서울의 도시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일제는 경제활성화와 ‘선만(鮮滿)경제블럭’ 구축의 일환으로 한반도에 큰 폭의 도시화를 강행했다.
이 시는 일제식민시절 시인이 겪은 도시화의 충격을 그리고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1∼3연)는 도시에 대해 긍정적 호감을 보인 데 비해 후반부(4∼5연)에서는 도시의 실체를 환멸 속에 담는다. 1933년 서울을 배경으로 1연에서는 도시를 교태어린 여성으로 묘사하여 도시의 고혹스런 풍경을 담는다. 2연에는 도시를 예술 작품으로 묘사하며 도시의 삶이 예술가의 삶과 같은 기쁨에 차 있음을 말한다. 3연에서는 도시의 환상적 아름다움에 비해 왜소한 시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인은 도시의 세련과 기쁨과 아름다움이 단지 무의미한 감각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렇게 4연은 ‘그러나’를 접속어로 사용하여 전반부의 시적 흐름을 긍정에서 부정으로 단숨에 역전시킨다. 회색의 도시는 시인을 고독하게 만들고 기계적인 삶을 일상화시킨다. 5연에서는 이 시가 단순히 내면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1933년 일제 강점기 서울의 실제 상황임을 단서처럼 달고 있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1930년대 모더니즘 시에서 풍미했던 김기림 식의 문명비판적 세계관은 아니다. 오히려 도시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소외되고 고독한 개인의 삶의 양태를 부각시킴으로써 비극적 정서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정감이 ‘잿빛 환멸’, ‘외로운 마음’과 같은 언술 속에 담긴다. 이는 당대 도시인의 보편적 삶의 양태로서 고독과 방황을 내재하고 있다. 특히 ‘페이브먼트’와 같은 생경한 도시성의 언어는 이 시가 거대 담론을 반영했다기보다는 시인 자신의 표피적인 모더니즘 취향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급격한 도시화 비주체적 근대화로 소외의식에 빠진 일제식민지인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고향상실을 대비적으로 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박팔양이 건강한 역사적 낙관주의와 모더니즘의 퇴영성 사이를 오가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로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