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5.6(cm), 80면. 1951년 문예사에서 발행하였다. 서문과 발문 없이 후기를 비롯 8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김춘수 시의 시적 지속성과 변이 양상은 존재의미를 탐구한 전기시로부터 무의미를 추구한 중기시와 이를 지양한 후기시로 대별된다. 이 시집은 김춘수의 세 번째 시집으로 전기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통일된 의식을 보여준다. 즉 언어와 대상 간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자기 존재 의식을 드러낸다.
이 탐색의 과정에서 김춘수는 유치환, 서정주 등 국내시인은 물론 말라르메, 발레리, 릴케 등의 외국 시인들을 사사(師事)한다. 실제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에 화답하여 「기(旗)-청마선생께」를 쓰기도 한다. 이 시집의 표제가 ‘기(旗)’인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시집의 형식적 고민이 「후기(後記)」에 담겨있다. “나는 나의 눈이 화석(化石)이 되기 전에 있는 힘을 다하여 장차 내 것이 될 성 싶은 것은 어떤 형식(形式)으로든지 이것을 적어 두어야만 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김춘수 이전의 관습적 형식에서 벗어나 화석화되지 않은 시를 쓰고자 결심하고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식적 반영이 이 시집의 시편들이며, 이후 전개되는 형식적 실험의 바탕이 된다.
김현은 이 시집을 소묘집(素描集)이라 별칭한다. 시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울 정도로 시인과 밀착된 정서의 표출이 내장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김동리 또한 이 시집의 피상성과 표피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시집의 존재성은 이 시집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시집들의 기반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탐색의 과정이 「집2」과 「갈대」 등의 시편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현실과의 괴리 속에 분열하고 있는 자아의 건강성을 회복하려는 토로라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시집은 아직은 김춘수 자신의 세계를 구체화하지 못한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적 가치는 협소하지 않다. 이 시집을 발판으로 이후의 시적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김춘수의 시력에서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존재탐구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하는 그의 시적 첫 걸음이라는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