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천은 부인 박성수와의 사이에 2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1931년 태어난 아들 한진은 소련에 유학하는 동안에 북한 체제를 비판하다가 결국 1958년 8월 소련에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재소 고려인 극작가가 되었으며 카자흐스탄의 국립고려극장 문예부장을 역임하였다. 한태천은 1948년 전후 월북하여 활발하게 문단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공식적인 활동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아들의 망명과 관련이 있거나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데뷔작은 희곡 「토성낭」이다. 1935년 1월『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 작품은 평양의 외성인 토성낭 빈민들의 절망적인 삶을 그렸다. 1936년 5월에는 『탐구』에 「산월이」를 발표하였다. 광복 후에는 「바우」(1947), 「성장」(1948)을 발표하였는데, 「바우」는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에서 지주가 몰락한다는 내용이다. 월북 후, 한국전쟁 시기인 1952년에 「명령 하나 밖에는 받지 않았다」를 발표하였다. 군사 목적극의 성격을 띠는 이 작품은 인민군 병사가 주인공이고 미국과 국군을 격퇴시키고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종전 후에는 「젊은 혁신자」 등을 발표하여 전후 복구와 발전을 위한 노력을 작품화했다. 1956년에는 『제2차 조선 작가 대회 문헌집』에 「신인 육성에 대하여」를 발표했고, 1958년 희곡집 『화전민』과 『승리자의 군상』을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