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안영일(安英一). 1909년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니혼대학[日本大學] 공과에 다니다가 1931년 중퇴하였다. 1932년 일본 좌익극장(左翼劇場) 제3기 연구생 과정을 수료하였다. 1933년 2월부터 일본 신축지극단(新築地劇團)에서 단역배우로 활동했다. 이후 1935년 동경의 조선인 연극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의 단원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예술좌에서 활동하던 1936년에 예술운동을 빙자하여 사상운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검거되었다. 조선예술좌가 해체된 후, 일본 신협극단 연출부에서 무대감독 또는 조연출을 맡았다. 안정호는 이때 일본인 연출가인 무라야마 도모요시로[村山知義]부터 연극 연출에 관한 광범위한 이론과 기술을 지도를 받았다.
1940년 귀국하여 주로 연출가로 활약하였는데, 신극 연출의 일인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때 그는 친일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직을 맡는 한편, 조선총독부가 후원하는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등 분명한 친일행적을 남겼다. 1945년 8월 ‘조선연극건설본부’를 조직하여 서기장을 맡았다. 1948년 월북한 이후에도, 꾸준히 연극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1964년에는 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이 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국립고전예술극장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1932년 좌익극장의 「조천탄갱(朝川炭坑)」에 출연하면서 연극배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5년 11월에는 조선예술좌의 창립공연에서 한태천이 쓴 희곡 「토성낭」의 연출을 맡음으로써 연출가로까지 데뷔했다. 귀국 후인 1942년 조선총독부가 후원하는 연극경연대회에 매년 참가하여 「행복의 계시」, 「물새」를 비롯하여 친일 연극인 「개화촌」·「산하유정」·「신사임당」등을 연출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조선연극동맹에서 김남천의 「3.1운동」, 김태진의 「임진왜란」, 함세덕의 「하곡」,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 등의 작품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연극 이론가로서 많은 글을 남겼는데, 1936년 『매일신보』에 「신극운동의 제경향」을 쓴 이후, 「전향기의 조선연극」(1940), 「조선연극의 역사적 단계」(1945), 「연극건설 기본방향」(1946) 등 연극이론과 평론 분야의 글들을 발표했다.
안정호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17~63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