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0월 제1회 문부성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교토미술학교를 거쳐 1937년부터 교토회화전문학교 연구과에 재학하면서 마루야마시조파(圓山四条派)의 대가 다케우치 세이호우(竹內栖鳳)의 제자였던 니시야마 스이쇼우(西山翠嶂)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일본채색화를 배웠다. 기요미즈 로쿠베이(淸水六兵衛: 일본 도예가)의 공장에서 그림 그리는 일도 했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작품에서의 농후한 일본색으로 나타나며, 이후 일본과 조선의 관전(官展)에서 큰 성과를 거두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1939년부터 44년까지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와 일본 문부성 전람회 등의 관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조선미전에는 1939년 「춘교(春郊)」의 출품을 시작으로 1940년 제19회 전시에서 「추원(追遠)」으로 조선총독상을 수상하였는데 1941년에도 「여(旅)」로 또 한 번의 조선총독상을 수상했다. 1942년에는 무감사 출품작가로 참가하여 「춘난(春暖)」으로 세 번째 조선총독상을 수상했다. 1943년 제22회 조선미전에는 무감사로 출품한 「청일(晴日)」이 특선을 수상하면서 이후 추천작가로 추대되었다. 1944년에는 「과염(瓜染)」을 출품했다. 1942년에는 제5회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활발했던 해방 전의 관전에서의 활동과는 대조적으로 해방 후의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1945년 해방직후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47년 배운성(裵雲成)이 설립을 계획했으나 개교하지 못한 조선예술원의 미술과 교수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88년 발표된 납·월북 미술가 해금작가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