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몽(慕施蒙)은 말갈계 발해인이며 관직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이다. 752년(발해 문왕 16) 9월 정묘일, 발해 사신단 일행 75명과 함께 일본의 월후국(越後國)좌도도(佐渡島)에 도착하였다. 일본 조정은 10월 경진일에 좌대사(左大使) 정6위상 판상기촌노인(板上忌寸老人) 등을 월후국에 보내 발해 사신의 도착을 탐문하였다.
이듬해인 753년 5월 을축일에 발해 사신단이 일본 수도로 들어갔다. 모시몽은 일본과 발해가 사신 왕래한지 이미 10여 년이 지났으므로 자신을 비롯한 일행 75명을 보내 나라의 선물을 전한다는 발해왕의 말을 전하였다.
일본은 발해 사신이 외교문서인 국서(國書)를 가져오지 않고, 신하로 칭하지 않는 등 예에 맞지 않다고 하여 쟁론이 있었으나, 모시몽 일행에게 잔치를 베풀고, 작위와 녹(祿)을 차등 있게 수여하였다.
같은 해 6월 정축일에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의 효겸천황(孝謙天皇)은 발해 문왕에게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냈다. “천황은 발해 국왕에게 경건히 문안드리오. 짐이 과덕함으로써 황위를 경건히 받들고 백성을 양육하고 팔극(八極)을 비추고 있소. (중략) 그런데 보내온 서한을 펼쳐보니 신하로 칭하는 이름이 없구려. ‘이전『고려구기(高麗舊記)』를 찾아보니 나라가 안정할 때에 올린 표문에는 족속(族屬)으로는 형제이고 의리로는 군신(君臣)이었소’”라고 하며, 향후 피차 서로 진퇴에 예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통하여 일본이 발해의 건국을 고구려의 부흥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발해가 일본에 신하를 칭하지 않은 것은 건국 이래 활발한 영토확장을 통하여 국력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