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욕(古欲)은 발해의 유민 출신이다. 1115년 2월 거란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오늘의 내몽골 赤峰 일대) 관할의 요주(饒州)에서 발해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스스로 대왕(大王)이라 칭하였다. 요주에는 그 관할 현(縣)과 성(城)에 다수의 발해 유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고욕은 바로 이들을 배경으로 하여 거병을 하였다.
『요사(遼史)』에 의하면, 요주의 관할 3개 현에는 모두 발해 유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락현(長樂縣)에는 거란 태조가 발해를 정벌하고 그 백성을 옮겨 현을 세워 거주시켰다. 호(戶) 4천 중에서 1천 호는 철(鐵)을 공납하였다고 하므로 제철·제련과 관련된 민호인 듯하다. 임하현(臨河縣)은 본래 풍영현(豐永縣) 사람들이 거주하였는데, 태종(太宗)이 발해를 정벌하고 옮겼으며 그 호수는 1천이다. 그리고 안민현(安民縣)은 태종이 발해의 여러 고을에서 사로잡은 사람을 섞어 설치한 것인데, 호 1천이 있었다. 또한 왕족과 귀족 등이 전쟁에서 얻은 포로로 설치한 두하성(頭下城) 혹은 두하군주에는 보병과 기병이 3만여 명에 있는데, 이들도 고욕의 거병에 동참했다.
1115년 3월, 요는 소사불류(蕭謝佛留) 등으로 하여금 토벌에 나섰으나, 4월에 고욕에게 패배하였다. 그래서 남면부부서(南面副部署) 소도소알(蕭陶蘇斡)을 도통(都統)으로 삼아 치게 하였으나 그도 5월에 패배하였다. 6월에 이르러서야 소도소알이 고욕 등을 사로잡고 수천명의 목을 베었다. 고욕의 발해부흥운동은 5개월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이듬해 정월에 고영창(高永昌)이 다시 동경(東京)에서 발해 부흥의 깃발을 드는 원천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