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15부 중 하나인 부여부(夫餘府)의 대수령(大首領) 출신. 당에 투항하여 무장으로 활동하였다. 당 현종에게 받은 이름은 노정빈(盧庭賓)이다. 중국 서안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묘지명을 통해 구체적인 생애가 세상에 알려졌다.
낙사계는 734년 8월당의 유주장사(幽州長史) 설초옥(薛楚玉)과 함께 거란과의 전쟁에 공봉장군(供奉將軍)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사실은『문원영화(文苑英華)』에도 기록되어 있다. 낙사계는 이때 노정빈(盧庭賓)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는데, 이는 당 현종에게 받은 성과 이름이다.
낙사계묘지명에 낙사계가 특별히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가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고구려의 후예로서 발해인이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낙사계는 비록 당에 투항해 무장으로 활동하면서 당나라 고위관직에 올랐지만 끝내 발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이는 낙사계묘지명의 수제(首題)에 당에서 받은 관직과 당 황제로부터 받은 성명이 아닌 “고투항수령낙사계(故投降首領諾思計)”라고 기록함으로써 발해의 수령이었던 사실을 밝히고 있는 데서 잘 확인된다.
그는 행좌우림군장군, 농우절도사, 경략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당 황제로부터 유격장군(游擊將軍), 영원장군(寧遠將軍), 명위장군(明威將軍), 선위장군(宣威將軍), 장무장군(壯武將軍), 충무장군(忠武將軍), 운휘장군(雲麾將軍),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등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748년 5월 장안성(長安城)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평강방(平康坊)에 있는 자택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