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묘 묘지명은 고구려 말기의 귀족으로 당에 귀순하여 활동한 고요묘의 묘지명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당에 들어가 활동했던 고요묘의 활동을 기록해 무덤 속에 넣었던 묘지명이다. 묘지명에는 묘주의 관직, 성명, 출신지와 당으로 들어오게 된 까닭과 당에서의 활동 및 묘주의 죽음과 묻힌 곳 등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고구려의 소장 고요묘는 평양성이 함락될 때 당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준 공으로 고위 무관직을 제수받고 황제를 호위하는 좌령군원외장군을 지냈다.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에서 활약한 고구려 유민의 존재 양상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된다.
고구려 멸망 후 당에 들어가 활동했던 고요묘의 활동을 기록해 무덤 속에 넣었던 묘지명이다. 2007년 12월 중국 섬서성 서안시에 있는 서안비림박물관에서 구입하여 입수했는데, 서안 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 이외에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다.
묘지명은 청석(靑石)으로 만들어졌고, 뚜껑돌〔蓋石〕과 지석(誌石)이 모두 남아 있다. 뚜껑돌의 크기는 가로 57㎝, 세로 57㎝, 두께 7.5㎝이고, 지석의 크기는 가로 56.6㎝, 세로 56.4㎝, 두께 11.5㎝이다. 뚜껑돌의 윗면에는 가로 44㎝, 세로 44.3㎝의 평면을 마련하고, 두 줄로 구획한 후, 그 안에 행당 3자씩 4행에 걸쳐 전서(篆書)로 「대당고좌령군원외장군묘지(大唐故左領軍員外將軍墓誌)」라고 12자를 새겨 넣어 묘지명의 주인을 밝혔다. 지석은 18행 15자로 방격(方格)을 그은 후, 앞뒤 2행씩은 공백으로 남겨두고 3행부터 16행까지 해서(楷書)로 1행당 15자, 총 173자를 새겨 넣었다.
묘지명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은 알 수 없다. 묘지명의 작성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묘주(墓主)인 고요묘가 세상을 떠난 673년 11월에서 멀지 않은 시점이었을 것이다.
묘지명에는 묘주의 관직, 성명, 출신지와 당으로 들어오게 된 까닭과 당에서의 활동 등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묘주의 죽음과 묻힌 곳 등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묘주인 고요묘는 요동(遼東) 즉 고구려 사람으로 당에 투항하여 궁정을 수비하고 황제를 호위하는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을 지냈다. 그는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잘 쓰고, 말솜씨도 좋았다. 이 고요묘라는 인물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高句麗本紀)에 668년 9월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될 때 신성(信誠) 휘하에 있다가 당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준 소장(小將) 요묘(饒苗)와 동일인이다.
고요묘가 당에 들어간 것은 고구려 멸망 직후였다. 668년 12월에는 당 고종(高宗)으로부터 평양성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종3품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이라는 고위 무관직을 제수받아 황제를 가까이서 호위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당에서 이민족 출신으로 투항해 온 인물들을 상당히 우대하였다는 사실을 고요묘묘지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과 대막리지(大莫離支)였던 연남생(淵男生)이 당에서 받았던 관직이 정3품이었다는 것과 비교해도 고요묘가 받은 종3품은 매우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에 투항한 지 5년만인 673년 11월 11일 고요묘는 장안성(長安城)에서 갑자기 사망했고, 장안성의 남쪽에 묻혔다.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는 출생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묘지명에는 우회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젊은 나이에 고구려 유민에게 암살당하여 일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소장 고요묘는 조국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배신자였고, 당에 들어가 고관대작으로 출세했다는 사실을 묘지명의 발견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요묘묘지명은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에서 활약한 고구려 유민의 존재 양상을 분명히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