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중국 하남성 평정산시 노산현 장점향 장비구촌에서 발견된 백제 유민 난원경(663723)과 부인 감씨(668734)의 묘지명으로 노산현문화관에 보관되어 있다. 애초 지석과 더불어 개석도 발견되었으나, 현재 개석은 소재를 알 수 없고 지석만 남아 있다. 묘지명은 백제 난씨 가문의 출자와 성씨의 유래, 난원경의 고조와 증조, 조부, 부친의 관력과 활동, 난원경의 생애와 활동, 죽음과 장례, 부인 감씨의 생애와 죽음, 난원경과 부부의 합장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묘지명의 수제에는 난원경이 당나라의 선위장군으로 좌위, 분주 청승부의 절충도위로 상주국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다음으로 난씨 가문의 출자와 선조들의 이력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먼 조상은 중국 황제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으로 대개 이민족 출신들이 조상을 중국 고대의 유명한 인물에 가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부여와 같은 부류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하였다. 이는 백제가 부여의 별종이라는 당대의 기록과 유사한 것이다.
묘지명에 선조에 대해 기록하면서 일반적인 당대의 묘지명과 달리 고조부터 언급하고 있다. 대개 증조-조부-부친 순으로 기록하지만, 한 대를 올려 고조부터 언급한 것은 백제 출신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고조인 난조가 백제의 달솔이었다고 기록한 것이 바로 난원경이 백제계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증조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조부 난한은 백제가 망한 후 당의 기미주인 웅진주도독부 장사를 지냈고, 부친인 난무는 웅진도독부 지심주 제군사와 자사를 지냈다고 기록했다. 이는 난원경의 조부와 부친이 웅진도독부에서 활약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백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난원경은 당에서 유격장군 행단주 백단부 우과의를 지냈고, 문장에도 뛰어나 중서성에 차출되어 근무했다. 이후 하주 영삭부 좌과의 도위를 지냈고, 군사에도 뛰어나 삭방군 총관에 제수되어 구성철륵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자금어대의 관작을 수여받기도 했다. 계속 전공을 세워 선위장군을 제수받고 분주 청승부 절충도위에 올랐다. 이처럼 난원경은 주로 무관으로 활약했다.
난원경이 다른 백제 유민들과는 달리 장안이나 낙양이 아니라 낙양 남쪽의 여주 용흥현에서 거주하다가 723년 6월 향년 61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단도현군의 관작을 받은 감씨로 좌옥금위대장군 감라의 장녀로 당의 무인 가문과 혼인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인 감씨는 난원경이 세상을 떠난 지 11년 뒤인 734년 11월 67세에 여주 노산현의 사제에서 돌아갔다고 했다. 장례는 부인 감씨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노산현 동북쪽의 언덕에 난원경과 합장하였다. 자손은 아들 1명이 있었던 것 이외에는 알 수 없다. 묘지의 말미에는 10수의 명을 기록하여 난원경의 조상과 난원경의 활동, 장례 등에 대해 찬양하였다.
난원경과 부인인 감씨 부부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으로 개석과 지석의 한 조로 구성되었다.
청석으로 만들었으며, 개석은 유실되고 지석만 남아 있다. 지석은 판석형이며 가로 56㎝, 세로 56㎝, 두께 9㎝이다. 측면에는 화훼절지문을 선각으로 새겨 넣었다. 가로 29행, 세로 30행으로 괘선을 그어 구획한 뒤에 모두 836자의 묘지명을 음각하였다. 글씨는 단정한 해서체로 씌어졌다. 묘지명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은 알 수 없다.
난원경묘지명은 백제에서 달솔에 오른 난조의 후예로 조부가 백제 멸망 당시 당군에 투항하여 웅진도독부에서 활동하였고, 부친 난문 역시 웅진도독부의 지심주제군사와 자사를 지내는 등 주로 웅진도독부에서 활동한 이력을 갖는 집안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난원경은 백제에서 태어났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당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무장으로 활약했으며, 삭방군 총관에 오를 정도로 출세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씨나 흑치씨, 진씨 등 다른 가문처럼 660년 당군의 백제 공격시 협조한 가문이었고, 당에 들어가서는 주로 무장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묘지명의 발견으로 백제에 난씨 성이 있었다는 것도 알수 있게 되었다. 백제유민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