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김일성 묘지명은 당나라에서 활동한 신라 왕족 출신인 김일성(713~774)과 부인의 합장 묘지명이다. 김일성 묘지명은 그의 자가 일용이므로 김일용 묘지명이라고도 부른다. 묘지명의 재질은 청석이며 지석과 개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김일성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당에 들어가 장안에서 현종 황제 등을 숙위하였고 당나라 여인 장씨와 혼인하여 장안성에서 살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김일성 묘지명은 문헌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당에서 활동한 신라 왕족의 면모와 신라 중대 정치사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정의
당나라에서 활동한 신라 왕족 출신인 김일성(713~774)과 부인의 합장 묘지명.
개설
내용
김일성 부부의 합장은 774년 8월 대종의 특별한 배려로 치러져 장안성 만년현을 관할하던 만년령이 주관하도록 하였다. 김일성의 사저인 숭현방과 장지인 영수향이 모두 장안현 관할지임에도 만년현을 관할하던 만년령에게 장례를 주관하도록 한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어쨌든 김일성 부부의 합장은 김일성이 세상을 떠난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동안 준비한 후 합장을 하였다.
지문의 말미에 묘주를 찬양하는 명문이 있는데, 바다 건너에서 건너와 황제를 충실히 숙위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지만 황제의 땅에 묻혔다는 내용이다. 아들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이름이 없어 알 수 없다. 결국 김일성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당에 숙위차 왔다가 당의 여인과 혼인하여 장안성에서 살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장안성 남쪽 영수향에 묻힌 것이다.
김일성이 신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것은 신라 중대 숙위의 특성상 근친과 혈족을 정치로부터 분리시켜 왕권을 강화하고자하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경덕왕은 뒤늦게 얻은 어린 아들과 왕권을 다툴만한 김일성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배제시키고자 귀국을 막았을 것이다. 경덕왕을 이어 즉위한 혜공왕 역시 정적이 될 수 있는 김일성의 귀국을 막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김일성은 왕좌를 둘러싼 신라 왕실 내부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당에서 일생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특징
현황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재당 신라인 김일용 묘지명에 대한 검토」(김영관, 『신라사학보』 27, 2013)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