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부여융 묘지명은 백제 의자왕의 태자로 웅진도독을 역임한 부여융(615~68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1919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망산에서 출토되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부여융의 장례를 치른 682년 12월에 만들어졌다. 크기는 가로 56.8㎝, 세로 대략 57.8㎝의 정방형에 가깝다.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27자씩 26행을 해서체로 써서 새겼다. 부여융의 선조와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부흥운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웅진도독부와 당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정의
백제 의자왕의 태자로 웅진도독을 역임한 부여융(615~68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
개설
묘지명은 부여융의 장례를 치른 682년 12월에 만들어졌다. 원래 묘지명이 묻힌 곳은 장례를 치른 낙양 북망산의 청선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내용
부여융은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기개가 삼한을 덮을 정도라 명성이 양맥(兩貊)에 전해졌다고 하였다. 양맥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칭하는 말이다. 성품은 효성스럽고 신중하여 선행을 행하고 의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병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기묘한 계책을 낼 줄 알아서 당 황제에게 귀부하였다고 하여 백제 멸망 당시 투항한 사실을 미화하였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웅진도독 백제군공에 봉해져 백제 유민들을 안무하는데 종사하였다는 것과 신라와는 수호하였다고 하여 665년 취리산 회맹에 참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665년 말과 666년 정월에 당 고종을 따라 태산 봉선에 참여한 사실과 이후 대방군왕에 봉해진 것 등 당에서의 활동에 대해 이민족으로 당에 투항하여 충성하였다는 것을 진나라의 유여(由余)와 한나라의 김일제(金日磾)에 빗대서 기록했다. 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는데, 향년 68세인 682년에 사제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12월 24일에 낙양 북망산의 청선리에 묻혔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의 사제는 낙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대 예법에 부친인 의자왕의 무덤 곁에 묻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가 묻힌 청선리는 부친 의자의 무덤이 만들어진 곳일 가능성이 크다. 묘지명의 뒷부분은 명(銘)을 기록하여 그의 선조와 일생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묘지명의 마지막 줄에는 묘지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표제를 달아 밝혔다.
특징
현황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唐代海東蕃閥誌存』(羅振玉, 1937)
- 「부여융묘지」(권덕영, 『중국 소재 한국 고대 금석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 「백제 멸망후 부여융의 행적과 활동에 대한 재고찰」(김영관, 『백제학보』 12, 2012)
- 「백제 부여융 묘지명에 대한 검토」(양기석, 『국사관논총』 62, 1994)
- 「부여융묘지명」(송기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 「洛陽,西安出土北魏與唐高句麗人墓志及泉氏墓地」(趙振華, 『洛陽古代銘刻文獻硏究』, 三秦出版社, 2009)
- 「부여융묘지에서 본 당대 한중관계」(黃淸連, 『백제사의 비교연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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