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반촌 일대에는 소코프가 이끌었던 러시아 빨치산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다반촌 주민들은 이들을 몰래 지원하였다. 하지만 다반촌을 점령한 일본군은 주민들이 빨치산과 연락을 한다고 하면서 온갖 횡포를 부렸다. 그들은 다반촌의 한인학교를 점거하여 1달 가량 머무르다가 불태워 버리고는빨치산의 공격을 염려하여 하바롭스크로 떠났는데, 가는 길에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교전 중에 전원 사망하였다.
그 뒤 칼미코프군과 함께 활동하였던 일본군이 다시 다반촌을 침공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몰래 연락을 하였던 50∼60명의 청년들은 소코프 빨치산부대에 들어갔고,부대 안에‘다반군대’라고 불린 한인 중대(中隊)가 조직되었다.
1918년에 이동휘(李東輝)는 러시아 하바롭스크(Khabarovsk)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승리를 위해 볼셰비키 정권의 도움을 받고자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만들었다. 한인사회당에는 적위군(赤衛軍)이 편성되었는데, 하바롭스크가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인 백위군(白衛軍, 백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해산되었다. 이들은 비록 2달 여의 짧은 기간 동안활동하였지만, 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백위군과 일본군을 비롯한 제국주의 간섭 세력에 맞서 싸운 최초의 조직이었다. 한인사회당 적위군의 조직적 투쟁은 그 뒤 한인사회당이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과 통합하여 군사 행동을 다시 준비하고 실행하는 기반이 되었다.
극동소비에트는 하바롭스크에서 아무르주(Amur州) 블라고베센스크로 옮긴 뒤, 1918년 9월 12일에 열린 회의에서 비합법활동으로 전환할 것과 빨치산 투쟁을 준비할 것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하바롭스크주와 아무르주 일대에서는 백위군과 제국주의 간섭군에 맞서는 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한인사회당 당원들도 아무르주와 연해주 일대로 흩어져 빨치산부대를 조직하였는데, 특히 한인사회당 적위군 생존자들도 아무르주 일대에서 빨치산부대를 구성하였다.
1918년 10월에 박 이반 다닐로비치가 아무르주 블라고베센스크에서 빨치산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때 하바롭스크 동쪽에 위치한 한인 마을인 다반에서도 한인사회당 적위군과 한인 광산노동자로 구성된 또 하나의 부대가 조직되었는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다반군대’라고 불렸다. 부대장은 최 니콜라이가 맡았는데, 그는 제정러시아 기병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였고,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에는 러시아 빨치산부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19년말부터 다반군대는 군사혁명사령부 사령관인 보이코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함께 칼미코프의 백위군이 장악한 하바롭스크를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후퇴하는 칼미코프 백위군을 추격하여 우수리(Ussuri)강 주변에서 여러 전투를 벌이면서 전과를 올렸지만 피해 또한 적지 않게 입었다.
하바롭스크가 해방된 뒤, 다반군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한 노선인 우수리철도 청룡역(靑龍驛)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1920년 4월에 연해주에서 4월참변(四月慘變)이 일어나자 러시아 인민혁명군과 함께 서쪽으로 물러나, 11월에 블라고베센스크에 도착한 다음에 러시아 인민혁명군 8연대의 특별한인부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다반군대는 8연대 군정위원회와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의 당적 지도를 받았는데, 한인부의 위원은 이전에 한인사회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던 박애(朴愛, ?∼1927), 계봉우(桂奉瑀, 1880∼1959), 김진(金震), 장도정(張道政), 박창은(朴昌殷)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뒤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여 특립(特立)사할린빨치산부대에 편입되었다.
다반군대는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한인사회당의 조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위군은 물론 일본군과 지속적으로 싸우면서, 한인사회당이 볼셰비키 정권과 레닌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