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위해서 활동하였던 단체이다. 사할린 한인과 한국 가족의 서신 교환을 비롯하여 귀국 희망자 명단 작성, 재판 추진, 가족 상봉 추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공론화시켰다.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소련 체제에서도 계속 억류되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인들을 귀환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려고 결성되었다.
‘화태(樺太)’는 일본어로 사할린(Sakhalin)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에 한인들은 남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되었다. 1945년 8월 이후에 소련이 사할린을 영토로 편입시킨 뒤에도 대부분 조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억류되었다. 다만 1956년에 소련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억류되었던 일본인이 송환되자, 일본인을 부인으로 둔 일부 한인들은 귀환하였다.
이 단체는사할린에 억류되었다가 송환된 한인들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1958년 1월에 일본으로 귀환하는 배에서 한인들은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하였고, 이어서 2월 6일에 박노학(朴魯學, 1912~1988)·이희팔(李羲八)·심계섭(沈桂燮) 등 50여 명의 한인들이 모임을 만들어 한국과 일본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박노학은 사할린 코르사코프(Korsakov)에서 한인 조직인 향우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30년 동안 회장으로 이 단체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화태억류귀환자 동맹본부’라고 불렀지만, 이어서 ‘제2차대전시 한국인 희생자연합회’,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 ‘화태귀환재일한국인회’ 등으로도 불렀다.
처음에는 한국과 일본, 소련, 유엔 등에 탄원서를 보내어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호소하였다. 그 뒤 1965년에 국교정상화를 위해서 한·일회담이 열렸을 때는 사할린 한인 문제를 의제로 채택하도록 끈질기게 청원하였지만,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사할린 한인과 한국의 가족이 서로 편지를 교환할 수 있도록 활동하였는데, 그 결과, 1970년대에 약 7천명에 이르는 귀국 희망자의 명부를 작성하여 한국과 일본 정부에 제출하면서적극적인 조처를 요청할 수 있었다. 1975년부터는일본 법원에 사할린 한인 귀환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귀환 운동을 공론화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1971년에 대구에서 화태억류귀환촉진회가 발족하였고, 한국방송공사(KBS) 사회교육방송에서「사할린 동포에게」라는 프로그램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1980년대 후반에는 일본에서 가족들의 재회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1988년에 초대 회장인 박노학이 세상을 떠난 뒤,이희팔이제2대 회장을 맡았다. 1987년에 ‘사할린잔류 한국·조선인문제 의원 간담회’가 발족되자 다양한 통로를 통해 지원을 하였다. 1989년에는 한·일 두 나라의 적십자사가 사할린 거주 한인 지원 사업을 본격화하여, 사할린에서도 이산가족회가 결성되었다.
귀환운동이 점차 정부간의 교섭 단계로 발전하자, 이 모임은 기존의 활동을 계속 유지하면서 모국 방문과 영주귀국 사업을 위한 개인 연락 등을 지원하는 외곽 단체로 활동하다가, 2000년대 이후에 사실상 활동을 정리하였다.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냉전 상황 속에서 무관심으로 방치된 사할린 한인 귀환을 국제적 문제로 부각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특히 피해 당사자가 30여 년이 넘도록 꾸준히 참여하면서, 사할린 한인 귀환의 실질적 결실을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