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러시아 극동지역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언론은 1904년부터 다양한 신문들이 발행되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련체제가 설립되면서 활성화되었던 한인신문은 1923년 3월 1일 『선봉』신문이 소련연해주 공산당당위원회의 기관지로서 공식적으로 창간되어 발행되면서 체계적인 발행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했고, 1937년 극동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직전인 1937년 9월 12일자 제1644호까지 발행된 후 크즐오르다로 이전됐다.
강제이주가 발생한 1937년 당시 선봉신문은 제6대 편집장인 최호림이 이끌고 있었는데, 최호림을 비롯한 선봉의 모든 직원들은 강제이주 직전 소련내무부 인민위원회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 가운데 농업부장이었던 황동훈만이 살아남아 강제이주로 정착한 크즐오르다에서 『선봉』을 이어받는 『레닌기치』로 중앙아시아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1923년 3월 1일 『레닌기치』의 전신인 『선봉』신문이 소련공산당 연해주 당위원회의 기관지로서 공식적으로 창간되었는데, 직접적인 발행은 1922년 8월 당시 백군이 점령하고 있던 연해주 우수리스크주 아누친스크 지역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1922년 8월 27일 제1호가 발간된 고려인 민족신문 『붉은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신문은 같은해 연말까지 총 4회 발간된 이 신문은 이듬해인 1923년 블라디보스톡을 적군이 차지하게 되면서 『3월1일』로 명칭이 변경되어 재발행되었고, 4호부터는 『선봉』으로 명칭이 바뀌어 발간되기 시작했다.
발행부수가 3-4천부에 달했고, 이 신문의 책임주필은 『3월1일』신문 주필이었던 이백초였으며, 이외에 이성, 오성묵, 이괄, 김진, 최호림, 박동희, 남창원, 황동훈 등이 활약했고, 『권업신문』과 『한인신보』의 주필을 지낸 김하구가 총무, 김철, 계봉우 등이 번역원으로 활약했다.
『선봉신문』은 당시의 시점에서 혁신적인 신문이었다. 신문형태도 1920년대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본식 인쇄방식에 의해 발행되고 있었는데, 선봉신문도 초기에는 한국과 일본 신문처럼 기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갔지만, 이후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1929년 4월 발행기관이 ‘러시아공산당 원동변강위원회와 직업동맹 원동변강쏘베트’로 바뀌면서 하바로프스크로 이전됐다. 이후 1933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서 발간을 계속되던 『선봉』은 1937년 9월 12일자 제1644호로 중단된 후 크즐오르다로 이전됐다. 당시 신문 발행진은 제6대 편집장인 최호림이 이끌고 있었는데, 최호림을 비롯한 선봉의 모든 직원들은 강제이주 직전 소련내무부 인민위원회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 가운데 농업부장이었던 황동훈만이 살아남아 강제이주로 정착한 크즐오르다에서 『선봉』을 이어받는 『레닌기치』로 중앙아시아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정기간행물인 신문형태이지만 발행사정이나 경영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창간초기부터 1925년까지는 주 1회, 그 후부터 1929년 사이는 주 2회, 1930년대에 들어서야 격일체제로 간행되었다. 1937년 가을 중앙아시아로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1937년 9월 중순 폐간까지 14년에 걸쳐 지령 1,644호가 발행되었다.
사회혁명의 선봉(아방가르드)에 선다는 이름을 딴 이 신문은 1923년 3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해주 거주 한인들이 창간한 한글신문으로, 창간당시에는 석판에 등사한 벽신문 형태였다. 편집자는 한반도의 지사출신으로 출판업에 종사하던 이백초, 이성, 오성묵, 이괄, 김홍집 등이 자주 바꾸어 맡았는데, 신문사 본사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하여 1929년 하바로프스크로 옮겼다가 1930년대 중반 블라디보스톡으로 되돌아왔다.
지면은 대개 1면에 사설, 조선국내의 소식중 주로 사회주의운동기사, 주요 세계 혁명소식이 차지했고, 2면에서는 상단에 세계 각지소식, 하단에 극동지역 단신과 문화면이 자리잡고 있었다. 3면에는 소련공산당 당사업보고, 강령, 지시, 각 기념식 연설문, 당의 결정서 등이 게재되었다. 4면에는 정치, 경제학강의, 신경제안 해설, 노동법 해설 등이 실려 있었다. 문화면의 문예페이지는 1925년 무렵 개설되었는데, 초기에는 투고자가 적어서 존폐를 거듭하다가, 1928년을 전후하여 연해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에 의해 ‘독자문예’ 등의 이름으로 문학작품 발표가 활성화되었다.
1928년 9월 8일자에는 당시 소련 작가 고리키가 고려인 작가들에 보낸 편지도 게재된바 있다. 이 문예란은 오랜기간 고려인 한글문학의 발표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소련초기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한글신문이 발행된 것은 당시 연해주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속한 새로운 국가인 소련체제의 변화에 대해 신속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당시 12만 한인들에게 이러한 변화를 전달해줄 수 있는 공식적인 언론매체가 필요했다. 이와 아울러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았던 이들의 권익과 민족전통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