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이주한 한인들이 거주하였던 마을이다. 주변의 여러 한인 마을 가운데 가장 부유한 마을이자 러시아 최대의 한인 마을이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옆을 흐르는 류치헤자[六汊河子]강에서 유래하였다. 다만 한인들은 마을을 푸칠로브카(Putsilovka)라고도 불렀다. 곧 한인들이 처음에 정착하였을 때,미하일 푸칠로(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Пуцилло, 1845~1889) 대위가 연해주 당국에 의해서 파견되어, 1년 반 동안을 머물면서 한인의 정착을 헌신적으로 지원하였는데, 그것을 기리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마을 옆을 흐르는 류치헤자강은 지금은 카자츠카(Kazachka)강이라고 불리는데, 라즈돌리노예(Razdol’noe)강이라고 불리는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오른쪽 분지를 흐르는 지류로, 강변은 접근이 어려울 정도로 나무가 무성한 황무지였다. 이곳은 우수리스크(Ussuriisk)에서 서쪽으로 약 25㎞ 정도 떨어진 곳인데, 한인들은 정착한 지34년만에 나무를 베고서 강변을 따라 넓고 비옥한 마을을 일구었다. 특히 관개와 교통이 편리하였으므로, 동서로 들을 끼고 있었던 마을은 남북으로 1617㎞ 정도의 큰 규모로 확장되었다.
1867년 12월에 함경도 경흥에 살고 있던 농민 150가구가 러시아 포시예트(Posyet) 지역의 연추(煙秋) 마을로 이주하였다. 당시 연추 마을은 이들을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이주민의 일부는 1868년 2월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옮겼다. 다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연해주 당국의 허가를 받아 다시 라즈돌리노예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당국에 자신들이 정착할 땅을 특별히 할당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당국은 수이푼강의 오른쪽에 자리한 분지를 할당하면서,미하일 푸칠로 대위를 보내어 한인들의 정착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1869년 4월에 이주민 10가구가 처음으로 류치헤자강 주변의 분지에 정착하면서 육성촌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주민은 정착한 뒤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조, 감자, 옥수수 등의 종자를 받아 재배하였다. 자연히 주민은 1년 만에 70가구로 늘어났고, 이어서 가축과 함께 추가 지원을 받으면서 34년이 지난 뒤에는 1617km의 크기로 마을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생활이 점차 안정되자, 1870년대 말까지 이주자들도 계속 증가하였다. 주민들은 주변 지역을 개척하였는데, 강변 양쪽에는강의 상류인 서쪽의 상소(上所)부터 동쪽으로 중소(中所), 관소(官所), 하소(下所) 등 4개의 촌락군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마적(馬賊) 무리들이 갑자기 마을을 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1870년대 말에는 한인들의 청원에 의해서 마을 안에 러시아군 초소가 설치되었다. 치안이 좋아지자, 1880년대 중반에는 274호 2,827명이 사는 큰 마을로 확장되어, 연해주의 한인 마을 가운데 규모로는 1위의 마을이 되었다. 1870년대에 러시아정교회(正敎會)와 함께 선교구가 배치된 이래, 1883년에는 2학급의 교회교구 학교가 들어섰는데, 교사를 겸한 사제가 3개 반 35명으로 구성된 한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뒤 언제 마을 이름이 푸칠로브카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892년에 코르사코프카(Korsakovka)를 읍의 치소로 삼은 러시아 지방행정체계에 복속되었다.
마을이 자리한 지역은 러시아 우수리 지역의 곡창 중 하나이다. 자연히 이 마을은 연해주 지역에 주요 채소와 식량을 공급하는 곳이자 한인 부농의 본거지로 기능하였다. 다만러시아가소련의 소비에트 체제로 전환하는 시기에 반(反)볼셰비키적 태도를 견지하였기에, 하바롭스크(Khabarovsk)를 기반으로 활동하였던 친볼셰비키적 성향의 한인들과 대립하였다. 특히 1928년∼1929년에는 ‘토호척결’ 대상 지역으로 인식되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37년에 한인들이 강제 이주된 뒤, 마을은 전형적인 러시아인 마을로 변하였다. 지금의 마을에는 우물, 묘지 등의 한인 거주 흔적과 함께 1928년 7월에 소련으로 망명한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였던 학교가 남아 있다.